1 하느님의 교사들은 표면적인 특성에 있어서 전혀 닮지 않았다. 그들은 몸의 눈이 보기에 전혀 닮지 않았으며, 출신 성분도 굉장히 다르고, 세상에 대한 경험도 아주 다양하며, 피상적인 "성격"도 뚜렷이 구별된다. 그리고 하느님의 교사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그들은 그들을 하느님의 교사로 확고히 세워줄 보다 심오한 특성들을 아직 습득하지 못한 상태다. 하느님은 당신의 교사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속죄 계획에서 특별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선물의 특별성은 물론 일시적일 뿐이며, 시간 밖으로 데려다주는 수단으로서 시간 안에 놓여있다. 교수·학습 상황은 거룩한 관계에 맞춰 조정되는데, 그 관계에서 태어난 이러한 특별한 선물은 배움에서 상급 수준에 도달한 모든 교사의 특성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모두 똑같다.
2 하느님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 모든 차이는 일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상급 교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신뢰
3 하느님의 상급 교사들이 자신의 기능을 이행하는 능력은 신뢰라는 토대에 놓여있다. 지각은 배움의 결과다. 사실 원인과 결과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지각은 곧 배움이다. 하느님의 교사들은 세상을 신뢰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은 세상이 지어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을 배웠기 때문이다. 세상은 권능의 지배를 받는다. 그 권능은 그에게서 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내면에 있다. 바로 이 권능이 모든 것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바로 이 권능을 통해 하느님의 교사들은 용서받은 세상을 바라본다.
4 그가 일단 이런 권능을 경험하면, 자신의 보잘것없는 힘을 다시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수리의 막강한 힘이 주어져 있거늘, 누가 참새의 변변찮은 날개로 날려 하겠는가? 하느님의 선물이 앞에 놓여있거늘, 누가 에고의 초라한 공물을 믿으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전환을 하게 하는가?
5 첫 번째로, 하느님의 교사는 소위 "무효화의 기간"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를 거쳐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지만, 보통 그렇게 경험된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것의 가치 없음이 인식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처음에는 그렇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지각자가 사물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지 않는 한, 그것의 가치 없음을 어떻게 지각할 수 있겠는가? 그는 아직 그러한 전환을 완전히 내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따라서 그 계획은 때로 외적인 상황처럼 보이는 것에서의 변화를 요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항상 도움이 된다. 하느님의 교사가 그만큼 배웠을 때, 그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6 다음으로, 하느님의 교사는 "가려내는 기간"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다소 힘들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변화가 항상 도움이 된다는 점을 배웠기에, 이제 모든 것을 그것들이 그러한 도움됨을 증진하는지 아니면 방해하는지에 근거하여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에 가치 있게 여긴 것 중에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상당수가, 자신이 배운 것을 새로 발생하는 상황에 전이하는 능력을 방해할 뿐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는 가치 없는 것들을 가치 있게 여겼고, 그런 까닭에 상실과 희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레슨을 일반화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물, 모든 사건, 모든 뜻밖의 조우, 그리고 모든 상황이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려면 아주 많이 배워야 한다. 이 환상의 세상에서 그것들에 어느 정도라도 실재성이 부여되어야 한다면, 그것들이 도움이 되는 정도까지만 그래야 한다. "가치"라는 단어는 다른 어떤 것에도 적용될 수 없다.
7 하느님의 교사들이 거쳐야 할 세 번째 단계는 "포기의 기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을 바람직한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단계는 엄청난 갈등을 발생시킬 것이다. 극소수의 하느님의 교사만이 이런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하지만 가치 없는 것에서 가치 있는 것을 가려내는 것은, 그다음에 오는 이 명백한 단계를 밟지 않는 한 무의미하다. 두 번째 단계가 완성될 때까지, 세 번째 단계가 시작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이 겹치는 기간은 하느님의 교사가 진리를 위해 자신의 최선의 이익을 희생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처럼 느끼는 기간이기 쉽다. 그는 아직 그런 요구가 얼마나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한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치 없는 것을 실제로 포기할 때만 이것을 배울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그는 큰 슬픔을 예상했던 곳에서 그 대신에 홀가분한 행복 하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선물 하나가 주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8 이제 "자리잡는 기간"이 온다. 이것은 하느님의 교사가 적당한 평화 속에서 잠시 안식하는 조용한 시간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배움을 통합한다. 이제 그는 그동안 배운 것의 전이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그것의 잠재력은 문자 그대로 깜짝 놀랄 만하며, 이제 하느님의 교사는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길 전체를 내다볼 수 있는 지점에 있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포기하고, 원하는 것은 간직하라." 명백한 것은 얼마나 단순한지! 그리고 얼마나 행하기 쉬운지! 하느님의 교사에게는 이렇게 한숨 돌리는 기간이 필요하다. 그는 아직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계속 나아갈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막강한 동반자들과 함께 간다. 이제 그는 잠시 안식하면서, 계속 나아가기 전에 그들을 불러 모은다. 여기서부터 그는 홀로 가지 않을 것이다.
9 다음 단계는 정녕 "동요의 기간"이다. 이제 하느님의 교사는 자신이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가치 없는지 실제로 몰랐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까지 그가 실제로 배운 것이라고는, 자신이 가치 없는 것은 원하지 않았고 가치 있는 것은 정녕 원했다는 점이 전부다. 하지만 그 차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스스로 가려내는 작업은 의미가 없었다. 그의 사고체계에서 너무나 중요한 희생이라는 아이디어는 그로 하여금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용의를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용의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길고 긴 시간 동안 도달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만을 요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방향으로 가는 각각의 단계가 아주 철저하게 강화되지 않았다면, 이것은 정녕 어려울 것이다!
10 그리고 마침내 "성취의 기간"이 온다. 바로 이 기간에 배움이 통합된다. 이제 전에는 그저 그림자로만 보였던 것이 평온한 때뿐만 아니라 모든 "위기 상황"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확고한 성취물이 된다. 사실 평온함은 그러한 성취물, 즉 정직한 배움, 사고의 일관성, 충분한 전이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평화의 단계다. 바로 여기에 천국의 상태가 충만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천국으로 가는 길은 탁 트이고 평탄한 길이다. 사실, 천국은 여기에 있다. 마음의 평화가 이미 완전하다면 그 누가 어딘들 "가려" 하겠는가? 그리고 그 누가 평온함을 무언가 더 바람직한 것으로 바꾸려 하겠는가? 과연 무엇이 이보다 더 바람직할 수 있겠는가?
• 정직함
11 하느님의 교사들의 다른 모든 특성은 신뢰에 근거한다. 일단 신뢰를 성취하면, 다른 것은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오로지 신뢰하는 자만이 정직할 수 있다. 오로지 신뢰하는 자만이 정직함의 가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직함은 네가 하는 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일관성을 의미한다. 네가 하는 말 중에 너의 생각이나 행동과 모순되는 것은 전혀 없다. 다른 생각과 상반되는 생각도 전혀 없다. 네가 하는 말과 어긋나는 행위도 전혀 없다. 다른 말과 일치하지 않는 말도 전혀 없다. 이러한 자가 참으로 정직한 자다. 그 어떤 수준에서도, 그는 자기 자신과 갈등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갈등할 수 없다.
12 하느님의 상급 교사들이 경험하는 마음의 평화는 주로 그들의 완벽한 정직함 덕분이다. 속이려는 소망만이 전쟁으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자는 갈등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갈등은 자기기만의 불가피한 결과며, 자기기만은 정직하지 않음이다. 하느님의 교사에게 시험이란 없다. 시험은 의심을 함축하는데, 하느님의 교사가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는 신뢰는 의심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는 성공할 수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에서 그런 것처럼, 그는 이 점에 있어서도 정직하다. 그가 오로지 성공할 수만 있는 이유는, 그는 결코 자신의 뜻을 홀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온 인류를 위해, 온 세상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위해, 겉모습 너머의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과 그의 창조주를 위해 선택한다. 그가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듯이 자신의 선택을 확신하면서, 완벽한 정직함 속에서 선택한다.
• 관용
13 하느님의 교사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판단하는 것은 네가 갖지도 않은 지위를 가진 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기만 없는 판단은 불가능하다. 판단은 네가 네 형제들을 잘못 보아 속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너 자신을 잘못 보아 속지 않았을 수 있겠는가? 판단은 신뢰의 결핍을 함축하는데, 신뢰는 여전히 하느님 교사의 전체 사고체계의 기반으로 남아있다. 신뢰가 상실되면, 그의 모든 배움이 사라진다. 판단이 없다면 모든 것을 동등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과연 누가 그와 달리 판단할 수 있겠는가? 판단이 없다면 모든 이가 형제들이다. 왜냐하면, 과연 누가 따로 떨어져 있겠는가? 판단은 정직함을 파괴하고 신뢰를 산산조각낸다. 그 어떤 하느님의 교사도 판단하면서 여전히 배우기를 바랄 수는 없다.
• 온유함
14 하느님의 교사들에게 해침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해칠 수도, 해침을 당할 수도 없다. 해침은 판단의 결과다. 해침은 정직하지 않은 생각에 뒤따르는 정직하지 않은 행위다. 그것은 어떤 형제에 대한,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유죄 판결이다. 그것은 평화를 끝장내고 배움을 부정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커리큘럼이 부재하며, 정신 이상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음을 입증한다. 하느님의 교사라면 누구나 해치려는 경향은 자신의 기능을 완전히 망각하게 만든다는 점을 훈련 과정에서 반드시 배워야 하며, 그것도 상당히 일찌감치 배워야 한다. 그것은 그를 혼란스럽고,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레슨을 배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해침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자들 외에는 그 누구도 하느님의 교사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해침으로부터는 어떤 이득도 볼 수 없다.
15 그러므로 하느님의 교사들은 전적으로 온유하다. 그들에게는 온유함의 강함이 필요하다. 구원의 기능은 온유함 속에서 쉬워지기 때문이다. 해치려는 자에게, 온유함은 불가능하다. 해침에서 어떤 의미도 보지 않는 자에게, 온유함은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제정신인 자가 과연 이것 외에 어떤 선택이 의미 있다고 보겠는가? 그 누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지각하면서 지옥을 선택하겠는가? 또한 그 누가 한결같고 모든 것을 품어 안으며 한계가 없는 온유함의 강함 대신에, 해침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약함을 선택하겠는가? 하느님의 교사들의 힘은 그들의 온유함에 놓여있다. 그들은 자신의 악한 생각이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의 창조주에게서 나온 것도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근원이신 분과 결합했다. 따라서 언제나 그분 자신의 것이었던 그들의 뜻은 자유로이 그 자체가 된다.
• 기쁨
16 기쁨은 온유함의 불가피한 결과다. 온유함은 이제 두려움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니 과연 무엇이 와서 기쁨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온유함의 활짝 벌린 두 손은 항상 가득차 있다. 온유한 자에게는 고통이 없다. 그는 괴로워할 수 없다. 그가 왜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한다. 공격에 슬픔이 뒤따르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온유함에는 기쁨이 따라온다. 하느님의 교사들은 하느님을 신뢰한다. 그들은 그분의 교사가 앞에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어떠한 해침도 일어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느님의 음성이 모든 일에서 그분의 교사들을 인도하므로, 그들은 그 교사의 선물을 들고 그의 길을 따라간다. 기쁨은 그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다. 그리스도 또한 감사하며 그들을 내려다본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만큼이나 그리스도 또한 그들을 크게 필요로 한다. 구원이라는 목적을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기쁜 일인지!
• 무방어
17 하느님의 교사들은 단순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들에게는 진리에 맞서 방어할 필요가 있는 어떤 꿈도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쁨은 누가 자신을 창조하셨는지 이해하는 데서 온다. 하느님의 창조물이 과연 방어를 필요로 하겠는가? 방어수단이란 단지 미친 환상의 어리석은 수호자일 뿐임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아무도 하느님의 상급 교사가 될 수 없다. 꿈이 더 괴상해질수록 꿈의 방어수단은 점점 더 맹렬하고 강력해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의 교사가 마침내 그 방어수단을 간과하겠다고 동의할 때, 그는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음을 발견한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속임수에서 천천히 벗어나도록 허용하지만, 신뢰가 커지면서 점점 더 빨리 배운다. 방어수단을 내려놓을 때 오는 것은 위험이 아니다. 그것은 안전이다. 그것은 평화다. 그것은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다.
• 아낌없이 주기
18 아낌없이 주기라는 용어는 하느님의 교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며, 사실 아주 주의 깊게 배워야 하는 의미다. 하느님의 교사들의 다른 모든 특성들처럼, 아낌없이 주기 또한 궁극적으로 신뢰에 근거한다. 신뢰가 없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아낌없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게, 아낌없이 주기는 "포기하기"라는 의미에서 "주어버리기"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교사들에게, 그것은 간직하기 위해 "주어버리기"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텍스트와 워크북을 통해 줄곧 강조했지만, 아마도 이 아이디어는 우리 커리큘럼의 다른 많은 아이디어들보다도 더 세상의 사고방식과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더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안에서 세상의 사고방식에 대한 역전이 아주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능한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이 말은 하느님의 교사들과 세상에게 정확히 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19 하느님의 교사는 자기 이익 때문에 아낌없이 준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는 세상이 말하는 자기를 일컫지 않는다. 하느님의 교사는 그가 주어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상 그에게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원하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그는 잃을 수만 있을 뿐이다. 그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보증서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왜 굳이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보장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정녕 하느님에게서 온 것, 따라서 그분의 아들을 위한 것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기를 원한다. 그것들이야말로 본래 그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들이야말로 그가 다른 이들에게 진정으로 아낌없이 줌으로써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인내
20 결과를 확신하는 자들은 기다릴 수 있으며,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린다. 인내는 하느님의 교사에게 자연스럽다. 그가 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확실한 결과뿐이다. 때로 그 결과는 그에게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 응답만큼이나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혹은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당된다. 과거 또한 틀림없었다.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난 듯이 보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도 이롭게 했다. 어쩌면 당시에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교사는 자신이 과거에 내린 결정들이 누구에게든 고통을 야기한다면 그 모든 것을 다시 고려할 용의가 있다. 신뢰하는 자에게 인내는 자연스럽다. 그는 시간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을 확신하기에, 이미 본 것이든 앞으로 올 것이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할 수 없다.
• 신실함
21 신실함의 정도는 하느님의 교사가 커리큘럼에서 얼마나 진보했는지 가늠하는 척도다. 그는 여전히 삶의 다른 측면들은 따로 떼어둔 채 몇몇 측면들만 골라서 배움으로 가져가는가? 그렇다면 그의 진보는 제한되고, 그의 신뢰는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않은 것이다. 하느님의 교사에게 신실함이란, 하느님의 말씀이 단지 몇몇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실함은 단지 몇몇 문제들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시작되어, 당분간은 조심스럽게 제한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모든 문제를 유일한 응답에 맡기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신실함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그것만이 진정으로 신실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각각의 단계는 성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 텍스트에서 언급하듯이, 준비되어 있음은 통달이 아니다.
22 그러나 진정한 신실함은 벗어남이 없다. 신실함은 일관되기에, 완전히 정직하다. 신실함은 흔들림이 없기에, 신뢰로 가득차 있다. 신실함은 두려움 없음에 근거하기에, 온유하다. 신실함은 확신하기에 기뻐하며, 굳게 믿기에 인내한다. 무방어가 자연스럽게 신실함을 뒤따르며, 기쁨은 신실함의 상태다. 그렇다면 신실함은 하느님의 교사들의 다른 속성들을 그 자체 안에 결합하는 것이다. 신실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고 당신의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실함은 항상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에게 기울여져야 한다. 신실함은 그들 쪽으로 눈을 돌려,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추구한다. 그리고 일단 발견하면, 신실함은 모든 신실함을 받아 마땅한 바로 그들만을 조용히 확신하며 안식한다.
• 열린 마음
23 하느님의 교사가 대체로 마지막에 습득하는 속성인 열린 마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그것과 용서의 관계를 인식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열린 마음은 판단 없음에 뒤따른다. 판단이 마음을 걸어 잠가 하느님의 교사를 내쫓듯이, 열린 마음은 그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한다. 정죄가 하느님의 아들을 악하다고 판단하듯이, 열린 마음은 그가 하느님을 대변하는 음성에 의해 판단받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죄의식을 투사하는 것이 그를 지옥에 보내듯이, 열린 마음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투사되게 한다. 오로지 마음이 열린 자들만이 평화로울 수 있다. 오로지 그들만이 평화의 근거를 보기 때문이다.
24 마음이 열린 자들은 어떻게 용서하는가? 그들은 용서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내려놓았다. 그들은 세상을 정말로 포기했으며, 세상이 새롭고도 기쁜 모습으로 자신에게 회복되게 했다. 그 변화는 너무도 영광스러워서,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에는 너무도 둔하고 생기 없어 보이던 것 중에 이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따뜻한 환영 인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아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구름도 전혀 없다. 이제 목표가 성취되었다. 용서는 커리큘럼의 최종 목표다. 용서는 모든 배움 저 너머로 가는 것을 위한 길을 닦는다. 커리큘럼은 자신의 정당한 목표를 넘어서려고 애쓰지 않는다. 용서는 모든 배움이 궁극적으로 수렴되는, 커리큘럼의 유일한 목표다. 정녕 용서로 충분하다.
25 너는 아마도 하느님의 교사들의 특성 목록에 하느님의 아들이 물려받은 유산은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랑, 죄 없음, 완벽함, 앎, 그리고 영원한 진리와 같은 용어들은 이와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기서 너무나 부적절할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것은 우리의 커리큘럼을 훨씬 뛰어넘기에, 그것의 현존 안에서 배움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의 현존이 가려져 있는 동안에는, 초점은 당연히 커리큘럼에 맞춰져야 한다. 세상에 진정한 배움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의 교사들의 기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전하는 것은 배운 것의 무효화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의 "진정한 배움"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용서라는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임무가 하느님의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들은 참으로 축복받았도다. 그들은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