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병이 분리라면, 치유하고 치유되려는 뜻은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내딛는 첫걸음이다. 모든 공격은 이것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며, 모든 치유의 생각은 이것에 더 가까이 가게 해준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유하기와 존재하기를 연합하는 것은 단지 너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연합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너에게 당신 자신을 주기를 뜻하시기 때문이다. 너 또한 너 자신을 그분께 드리기를 뜻한다. 네가 그분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상태에서는 단 하나의 뜻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하느님과 그분 왕국의 어떤 부분이든 공격할 때 너의 이해는 완벽하지 않으며, 따라서 네가 뜻하는 것은 너에게 상실된다.
17 그러므로 치유는 이해에 대한 레슨이 되며, 너는 더 많이 치유할수록 더 좋은 교사이자 더 좋은 학생이 된다. 네가 진리를 부정했다면, 진리로 치유된 자들이야말로 진리의 실재성에 대해 가장 잘 증언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 자신도 반드시 그들 가운데 포함해야 한다. 그들과 결합하려는 너의 용의 안에서 너의 치유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네가 성취하는 모든 기적은 너에게 하느님의 부성에 대해 말해준다. 네가 네 형제로부터, 혹은 너 자신의 마음 안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치유의 생각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네가 상처를 주는 생각을 품을 때마다, 그것을 어디에서 지각하든 상관없이, 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네가 아들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18 그리고 부정은 사랑만큼이나 총체적이다. 너는 너의 일부만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남은 부분은 통합되지 않아서 의미 없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분은 너에게 의미가 없기에, 너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분명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오로지 너 자신만을 치유할 수 있다. 오로지 하느님의 아들만이 치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치유가 필요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잊었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19 치유는 하느님의 아들이 온전하게 만들기를 원한다는 표시다. 이런 용의는 그 자신의 귀를 열어 성령의 음성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성령의 메시지는 정녕 온전성이다. 그는 너로 하여금 네가 행하려는 치유 훨씬 너머로 갈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온전하게 만들려는 너의 작은 용의 옆에 자신의 완전한 뜻을 놓아서 너의 뜻을 온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하느님의 부성을 지녔거늘, 하느님의 아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없겠는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너의 초대가 있어야 한다. 네가 초대하는 손님은 반드시 너와 함께 머물러 산다는 것을 너는 확실히 배웠기 때문이다.
20 성령은 환영하지 않는 집주인에게는 말을 걸 수 없다. 그는 성령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손님은 계속 머물겠지만, 그의 음성은 이질적인 집단 사이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성령은 너의 보호가 필요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너의 관심이 네가 성령을 원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성령처럼 생각하라. 그러면 작은 불꽃은 너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빛이 되어, 성령이 너의 유일한 손님이 되게 한다. 에고에게 들어오라고 청할 때마다, 너는 성령을 덜 반기게 된다. 성령은 계속 머물겠지만, 너는 성령께 맞서 동맹을 맺은 것이다. 네가 어떤 여정을 밟기로 선택하든, 성령은 너와 함께 가면서 기다릴 것이다. 너는 성령의 인내심을 신뢰해도 좋다. 그는 하느님의 일부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에게는 인내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21 네가 안식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너 자신의 기능을 알고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오로지 그럼으로써만 너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온전하게 결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당신 자신을 너에게 주셨다. 하느님을 소유한 너는 분명 하느님과 같을 것이다. 그분의 기능은 그분이 너에게 주신 선물과 더불어 너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앎을 너의 마음 안으로 다시 초대해 들이되, 그것을 가릴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게 하지 말라. 하느님이 네게 보내신 손님은 그렇게 할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네가 단지 작은 불꽃을 알아보고 그것이 커지도록 허용할 용의를 낸다면 말이다. 너의 용의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 성령의 용의가 완벽하기 때문이다. 네가 성령께 그저 작은 자리만 드린다면 성령은 그 자리를 너무도 환히 밝혀줄 것이며, 따라서 너는 그것을 기쁘게 확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확장을 통해, 너는 창조를 기억하기 시작할 것이다.
22 너는 에고의 인질이 되려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집주인이 되려는가? 너는 오로지 네가 초대하는 이만 받아들일 것이다. 너는 누가 너의 손님이 되어서 너와 얼마나 오래 머물지 결정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여전히 네가 그것을 어떻게 보는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거기에 있다. 비록 너의 초대 없이는 너를 도울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에고는 네가 초대해 들이든 말든 아무것도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실재를 반가이 맞아들이는 데 달려있다. 그리고 너의 손님들 가운데 오로지 성령만이 실제다. 그렇다면 단지 그곳에 이미 있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누가 너와 함께 머물러 사는지 알고, 허구의 위로자들에게 만족하지 말라. 하느님의 위로자가 네 안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