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환상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환상을 보지 않는 것이 그것을 보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환상을 피해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환상은 위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에고의 사고체계를 더 잘 직시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함께 그것을 물리칠 등불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는 그 사고체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므로, 분명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 일에 아주 차분히 임하자. 우리는 다만 진리를 정직하게 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에고의 "역동"이 우리의 레슨이 될 것이다. 너는 이미 에고를 실재화했으며, 따라서 에고 너머를 보려면 먼저 에고의 "역동"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이 잘못을 조용히 무효화하고, 그 너머로 진리를 바라볼 것이다.
40 앎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 외에 과연 무엇이 치유이겠는가? 환상을 보호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외에 과연 어떻게 환상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직시할 것은 실로 두려움의 근원이지만, 너는 이제 두려움은 실제가 아님을 확실히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두려움의 결과는 단지 그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다음 단계는 물론, 결과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법칙은 진공 속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며, 무로 이어지는 것은 일어난 적이 없다. 실재는 실재의 확장을 통해 인식되며, 따라서 확장되어 무가 된 것은 실제일 수 없다.
41 그러니 두려움을 바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움은 실로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함은 정의상 혼동을 무효화하며, 빛을 통해 어둠을 바라보는 것은 어둠을 물리칠 수밖에 없다. "에고 역동"에 대한 레슨을 시작하면서, 우선 이 용어 자체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음을 이해해 보자. 사실 이 용어는 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용어상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역동"이란 무언가를 할 능력을 함축하며, 분리 오류 전체는 에고에게 무언가를 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에 놓여있다. 네가 에고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리는 아주 단순하다:
42 모든 능력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분에게서 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다.
43 그렇다면 에고를 직시할 때 우리는 역동이 아닌 망상을 검토하는 것이다. 우리는 망상체계를 전혀 두려움 없이 고찰할 수 있다. 그 근원이 참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결과도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에고의 목표를 알아차린다면, 두려워하는 것은 더욱 부적절해진다. 그 목표는 전혀 말도 안 돼서, 그것을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필연적으로 무에 소비될 수밖에 없다. 에고의 목표는 아주 명백하게 에고의 자율성이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에고의 목적은 분리되고 자립적이 되는 것이며, 자신의 능력 외의 모든 능력에서 독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분리의 상징인 까닭이다.
44 모든 아이디어에는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항상 그 아이디어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것이다. 에고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에고의 핵심적인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그 결과를 무효화하는 방법은 단지 그 근원이 너의 진정한 본성과 어긋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말했듯이, 하느님께 맞서 뜻하는 것은 소망적 사고일 뿐 진정으로 뜻을 내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나다. 그분의 뜻의 확장은 그 뜻 자체와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가 경험하는 진짜 갈등은 에고의 헛된 소망과 네가 공유하는 하느님 뜻 사이의 갈등이다. 이것이 과연 진짜 갈등일 수 있겠는가?
45 자율성의 독립이 아닌 창조의 독립이 네 것이다. 너의 모든 창조적 기능은 네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데 놓여있다. 그분은 당신의 기능을 너와 공유하신다. 하느님은 그것을 공유하려는 뜻을 내심으로써, 네가 그분께 의존하듯이 너에게 의존하게 되셨다. 에고의 오만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 그분은 너로부터 독립하기를 뜻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자율성 안에 너를 포함하셨다. 너는 그분과 떨어진 자율성이 의미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에 대한 의존 안에 너의 자유가 있건만, 에고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은 너로 하여금 네가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앎을 대가로 치르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자유는 그분에 대한 의존 안에 놓여있다. 에고는 모든 의존을 위협적이라고 보며, 심지어 하느님을 향한 너의 열망조차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왜곡했다. 하지만 너의 갈등에 대한 에고의 해석에 속지 말라.
46 에고는 항상 분리를 위해 공격한다. 에고는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에고의 자율성이라는 목표는 실로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고는 실재에 대해서는 총체적으로 혼동하지만, 자신의 목표는 놓치지 않는다. 에고는 자신의 목적을 아주 확신하므로, 너보다 훨씬 더 바짝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너는 너의 목적을 알지 못하므로, 정녕 혼동하고 있다.
47 너는 다음을 인식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에고는 네가 에고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에고가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에고는 너의 독립성을 축소하고 너의 능력을 약화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의 충성을 요구하면서 에고가 내세우는 유일한 주장은, 자신이 너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너는 에고에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약 에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너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너 자신에게서 능력을 박탈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에고가 어떻게 계속 존재할 수 있겠는가?
48 에고는 네가 너 자신을 거만하고, 불신하고, "태평하고", 거리를 두며, 감정적으로 피상적이고, 냉정하고, 무관심하며, 심지어 절망적이라고 보는 것은 허용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도록 허용도 하지만, 너 자신이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에고는 두려움을 최소화하되 무효화하지는 않으려고 끊임없이 애쓰며, 이것은 에고가 아주 재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두려움을 통해 분리를 떠받치지 않는 한 에고가 어떻게 분리를 설교할 수 있겠는가? 에고가 바로 이런 짓을 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너는 과연 에고의 말을 귀담아듣겠는가?
49 그러므로 네가 다음을 인식하는 것이 에고에게는 근본적인 위협이다: 두려움이 어떤 형식을 취하든, 네가 두려움을 어떻게 경험하기를 에고가 원하든 상관없이, 너를 하느님으로부터 분리하는 듯한 것은 오로지 두려움뿐이다. 이러한 자각에 의해, 자율성이라는 에고의 꿈은 토대까지 흔들린다. 너는 독립이라는 거짓 아이디어에 동의할 수는 있지만, 두려움이 그 대가임을 인식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바로 그 대가이며, 에고는 그것을 줄여줄 수 없다. 네가 사랑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면 너 자신을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너는 비실재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너는 진리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고 믿음으로써, 공격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아주 단순히 말해, 너는 너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을 파괴하리라고 믿는 것을 배우려고 뜻하지 않는다.
50 에고의 자율성이라는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목적이 무산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이 정녕 무엇인지 배워야만, 너는 마침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에고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에고의 목표는 성취될 수 있고 하느님의 목적은 성취될 수 없다. 성령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오로지 하느님의 목적만이 성취이며, 그것은 이미 성취되었다.
51 네가 하느님께 의존하듯이, 하느님도 너에게 의존하신다. 그분의 자율성은 너의 자율성을 포괄하며, 따라서 너의 자율성 없이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네가 너의 자율성을 확립하기 위한 길은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것, 그리고 진정으로 존재하는 대로의 너의 기능을 이행하는 것뿐이다. 에고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너는 하느님의 기능이 곧 너의 기능이고, 너와 그분의 결합된 뜻을 떠나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음을 안다. 네가 아주 열심히 추구해 온 에고의 목표는 너에게 두려움만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단지 이것만 인식하라. 그러면 두려움이 곧 행복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52 두려움으로 유지되는 바로 이것을, 에고는 네가 믿기를 바란다.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정신 이상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을 믿을 수 없다. 그가 단지 그것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자들만이 사랑 대신 두려움을 선택할 것이며, 제정신이 아닌 자들만이 공격으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정신인 자들은, 공격만이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들을 두려움에서 완전히 보호한다.
53 에고는 분석하지만, 성령은 받아들인다. 오로지 받아들임을 통해서만 온전성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 분석하는 것은 곧 분리해 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총체성을 조각내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명백히 에고가 모든 것을 대하는 특유의 모순적인 접근법이다. 다음을 결코 잊지 말라: 에고는 힘과 이해와 진리는 분리에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 에고는 공격할 수밖에 없다. 에고는 그러한 믿음이 전혀 확립될 수 없음을 알지 못하고, 분리가 곧 구원이라는 확신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서,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공격한다. 에고는 그것들을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없는, 따라서 전혀 의미가 없는 작고 단절된 부분들로 쪼갬으로써 공격한다. 에고는 항상 의미를 혼란으로 대체할 것이다. 만약 분리가 구원이라면, 조화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54 지각의 법칙에 대한 에고의 해석은 성령의 해석과 정반대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에고는 잘못에 초점을 맞추고 진리를 간과한다. 에고는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실수를 실재화하며, 특유의 순환 논리를 사용하여 바로 그 실수 때문에 일관된 진리는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그다음 단계는 뻔하다. 일관된 진리가 무의미하다면, 진리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일관되지 않음이 진리여야 한다. 에고는 잘못을 마음에 확실히 간직하고 자신이 실재화한 것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사고체계 안에 있는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잘못이 실제이고 진리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55 에고는 이것을 이해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끈질기게 한다. 의미를 공격하기 위해 분석하는 에고는 의미를 간과하는 데 성공하며, 결국 일련의 조각난 지각들만 남게 된다. 에고는 이것들을 자신을 위해 하나로 합친다. 그러면 이것이 에고가 지각하는 우주가 되며, 이어서 이 우주는 에고 자신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56 에고에게 귀 기울이려는 자들에게 에고의 증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과소평가하지 말라. 선택적인 지각은 에고의 증인들을 주도면밀하게 선택한다. 그리고 그 증인들은 과연 일관성이 있다. 정신 이상을 옹호하는 주장은 정신 이상자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다. 논증은 시작 단계에서 끝나고, 어떤 사고체계도 그 근원을 넘어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논증은 아무것도 입증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설득되는 자들은 망상에 빠져있음에 틀림없다. 에고는 진리를 간과하거늘, 과연 진실하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에고가 과연 스스로 부정한 것을 지각할 수 있겠는가? 에고의 증인들은 에고의 부정은 입증하겠지만, 에고가 부정한 대상을 입증할 리는 없다! 에고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에고는 그분의 아들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57 너는 아버지를 기억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아들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반드시 그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무엇도 그분 아들의 가치 없음을 입증할 수 없다. 그 무엇도 거짓을 참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네가 에고의 눈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에게서 보는 것은 그분의 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지만, 아들이 있는 곳에는 아버지도 틀림없이 계신다. 하느님이 부정하지 않으시는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그분은 그것의 진리를 입증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 증인들은 그분의 빛 속에 서서 그분이 창조하신 것을 바라본다. 그들의 침묵은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보았다는 표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아버지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말하기에, 그들은 조용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이다.
58 네가 만나는 모든 형제는, 네가 그의 내면에서 무엇을 지각하는지에 따라,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되거나 에고를 위한 증인이 된다. 모든 이는, 네가 지각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네가 경계해 지키기로 선택한 왕국의 실재성에 대해 너에게 확신시켜 준다. 네가 지각하는 모든 것은, 네가 참이기를 원하는 사고체계를 위한 증인이다. 모든 형제는, 네가 만약 자유롭기를 뜻한다면, 너를 해방할 권능을 갖는다. 네가 형제에게 불리한 거짓 증인을 불러온 것이 아닌 한, 너는 그에 대한 거짓 증언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형제가 너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면, 네가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다만 너 자신의 음성을 들을 뿐이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가 너를 통해 말한다면, 너는 그리스도의 말을 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