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그렇다면 치유하는 것은 곧 성령을 네 형제와 공유함으로써, 그는 물론 너 자신 안에서도 지각을 교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 둘 다를 왕국 안에 놓아주고, 너희 마음에 왕국의 온전성을 회복해 준다. 이것은 창조와 유사하다. 창조는 증가를 통해 통일하고 확장을 통해 통합하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투사하는 것을 믿는다. 이것은 왕국은 물론 이 세상에서도 바뀔 수 없는 마음의 법칙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 내용이 다르다. 마음의 법칙이 이 세상에서 지배하는 생각들은 왕국의 생각들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법칙이 질서를 유지하려면 상황에 맞춰 조정되어야 한다.
11 마음의 법칙이 이 세상에서 작동할 때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은, 네가 그것을 지킴으로써(그리고 장담하건대, 너는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다.) 정반대의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 법칙이 이 세상의 상황에 맞춰 조정되었기 때문인데, 그곳에서는 실로 정반대의 결과들이 있다고 믿어진다. 마음의 법칙은 생각을 지배하며, 너는 정녕 갈등하는 두 음성에 반응한다. 너는 "자유들"을 달라는 주장을 많이 들어왔는데, 만약 사람들이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기로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정녕 자유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유들"을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으로 지각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옹호의 저변에 깔린 논거는 지극히 타당하다. 자유는 참이므로, 자유를 얻으려고 싸우지 말고 자유와 한편이 되어야 한다.
12 자유를 반대하는 자들은 자유의 결과가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은 참일 수 없다. 그러나 자유를 찬성하는 자들은, 비록 자유를 어떻게 옹호할지에 대해 잘못 인도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인 것과 한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안의 양 측면에 공평하게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라면 항상 바른 결정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정녕 그에 대한 답을 가졌기 때문이다. 갈등은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듯이 보일 수 있지만, 분명 개인 안에서 먼저 일어난 것이다.
13 "개인 안에서"는 분명 에고의 용어다. "개인의"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것이 아닌 "한 사람에 관한" 것임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개인들 사이에서"라는 용어도 유사한 잘못이다. 그것은 서로 다르거나 분리된 사람들 가운데 존재하는 무언가를 일컫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에서 계시의 극도로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 말했을 때, 곧이어 공유라는 면에서 계시가 낳을 수밖에 없는 결과들에 대해 설명했다. 한 개인이 자신을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는 자신이 몸에 묶여있다고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마음이라고 지각할 때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 안에", "정신들 사이에" 등의 용어를 서로 다르고 갈등한다고 보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마음들은 정녕 완벽하게 일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4 왕국 밖에서는, 왕국 안을 지배하는 법칙이 "너는 네가 투사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형식에 맞게 조정된다. 이것은 왕국의 법칙이 가르치기 형식을 취한 것이다. 왕국 밖에서는 배우기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가르치기가 의무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왕국의 법칙이 취하는 이런 형식은 명백히, 너는 네가 다른 이들에게 투사하여 그 결과 그들의 정체라고 믿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너의 정체를 배울 것임을 의미한다. 왕국 안에는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없다. 그곳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왕국에는 오로지 확실성만 있다. 존재의 확실성 안에 있는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들은, 너는 실로 네가 투사하는 바로 그것임을 안다. 왕국의 법칙이 취하는 그러한 형식은 결코 상황에 맞춰 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친히 그 법칙에 의해 창조하심으로써, 그 법칙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처럼 창조하는 그분의 아들들은 그 법칙을 기꺼이 따른다. 그들 자신이 창조될 때 그랬듯이, 천국의 증가도 그 법칙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5 법칙이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소통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다른 언어를 말하는 자들을 위해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나 좋은 번역자는, 비록 자신이 번역하는 것의 형식은 반드시 바꿔야 하지만, 결코 그 의미를 바꾸지는 않는다. 실제로 번역자의 목적은 형식을 바꿈으로써 본래의 의미가 보존되도록 하는 것이 전부다. 성령은 하느님의 법칙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번역해 주는 번역자다. 너 스스로는 이 일을 할 수 없다. 갈등하는 마음은 하나의 의미에 충실할 수 없으며, 따라서 형식을 보존하려고 의미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16 성령이 번역하는 목적은 당연하게도, 정확히 그 반대다. 성령은 오로지 본래의 의미를 모든 면에서 모든 언어로 보존하기 위해서만 번역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형식상의 차이가 의미 있다는 것에 반대하여, 그러한 차이는 중요하지 않음을 항상 강조한다. 성령의 메시지는 그 의미가 항상 같으며, 오로지 그 의미만이 중요하다. 하느님의 창조 법칙이 완벽한 형식을 취할 때는, 그분의 아들에게 진리를 확신시키기 위해 진리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진리의 확장은 왕국의 법칙으로서, 진리가 정녕 무엇인지에 대한 앎에만 의존한다. 이것은 네가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전혀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했을 때, 너는 배우는 자가 되었다.
17 배움과 기억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기억 없이는 배움이 불가능하다. 배운 것이 기억되지 않는 한, 배움은 일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성령은 정녕 기억하기에 관한 레슨이다. 우리는 전에 성령은 기억하기와 잊기를 가르친다고 말했지만, 잊기의 측면은 단지 기억하기를 일관되게 만들기 위해서일 뿐이다. 너는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잊는다. 성령이 번역한 것을 지각하는 두 가지 방법에 귀 기울이는 한, 너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를 이해하려면, 다른 하나를 잊거나 포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일관성을 배워서 마침내 일관성 있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8 혼동하는 자들에게 왕국의 완벽한 일관성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혼동은 의미를 해치며, 따라서 학습자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왕국에는 그 어떤 혼동도 없다. 그곳에는 오로지 하나의 의미만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그 의미가 곧 하느님이다. 그 의미는 또한 너이므로, 너의 창조주가 그러셨듯이 너도 그 의미를 공유하고 확장한다. 그 의미는 완벽하게 이해되므로 번역이 필요 없지만, 확장을 의미하므로 정녕 확장이 필요하다. 소통은 완벽하게 직접적이고 완벽하게 연합되어 있다. 소통에는 긴장이 전혀 없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결코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 정녕 하느님의 왕국인 이유다. 소통은 본래 하느님께 속하며, 따라서 하느님을 닮았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왕국의 실재다. 그리고 그 왕국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