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어떤 마음도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뜻보다 더 강하다고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어떤 마음이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다르다고 믿는다면, 그 마음은 단지 하느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고 결정하거나, 혹은 하느님의 뜻은 두렵다고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는 무신론자를, 후자는 순교자를 설명해 준다. 순교는 많은 형식을 취하며, 이 범주에는 하느님이 어떤 종류든 희생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리가 들어있다.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유형의 정신 나간 결정은 어느 쪽이든 공황 상태를 일으킬 것이다. 무신론자는 자신이 혼자라고 믿고, 순교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버림받음과 복수를 너무나 두려워하지만, 무신론자는 버림받음에, 순교자는 복수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98 무신론자는 하느님이 자신을 떠나셨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 하느님이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고 말하면 그는 몹시 두려워하고, 그 때문에 몹시 화를 낼 것이다. 반면에 순교자는 죄의식을 더 의식하며, 처벌을 면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자신이 처벌을 좋아하도록 가르치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은 아주 단순하다: 그 누구도 버림받음이나 복수를 원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둘 다 추구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너는 과연 성령께 이런 "선물"을 요청해서 받을 것이라고 실제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어떤 것을 너에게 줄 능력이 전혀 없다. 그의 임무는 너를 위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네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원하도록 만들 수 없다. 보편적 제공자에게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청할 때, 너는 주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창조된 적이 없는 이유는, 그것은 결코 너를 위한 너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99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가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들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라는 인식이다. 진리의 현존 안에는 믿지 않는 자도 없고, 희생도 없다. 실재의 안전 안에서, 두려움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정녕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두렵게 보일 수만 있을 뿐이다. 두려움은 원인 없이는 실제일 수 없으며, 하느님이 유일한 원인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너는 정녕 그분을 원한다. 이것이 정녕 너의 뜻이다. 이것을 요청하라. 그러면 반드시 응답받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본래 너에게 속한 것만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 성령께 너를 해칠 무언가를 요청한다면, 그는 응답할 수 없다. 너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따라서 그럴 때 너는 무를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에서 비롯되는 모든 갈망은 정녕 무에 대한 갈망이며, 그것에 대한 요청은 실제로 어떤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요구의 형식을 취한 부정일 뿐이다. 성령은 형식에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의미만을 알아차리고 있다. 에고는 성령께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다. 에고와 성령 사이에는 완벽한 소통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성령께 모든 것을 요청할 수 있다. 너의 요청은 너의 뜻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실제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과연 하느님의 뜻을 부정하겠는가?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안에서 그분의 뜻을 인식하지 못하겠는가?
101 너는 창조에서 빼낸 에너지를 두려움에 써버린다. 이것은 너의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너의 에너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너는 진리를 부정하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를 써버리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으면서 고집스럽게 시도한 자에게 뭐라고 말해주겠는가?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불가능한 것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은 창조의 원리와 완전히 어긋난다. 하느님은 네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행복이 달려있도록 뜻하실 수 없었다.
102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필요는 없지만, 받아들일 필요는 있다. 네가 사실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네가 만약 손으로 눈을 가린다면,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너는 시각의 법칙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사랑을 부정한다면, 사랑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너의 협력은 사랑의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만들지 않은 법칙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행복의 법칙은 너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해 창조된 것이다.
103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두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 시도가 완강하다면, 반드시 공황 상태를 일으킬 것이다. 비록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너는 실재에 반하여 뜻하기를 아주 완고한 목표로 만들 수 있다. 비록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결정의 결과를 숙고해 보라. 너는 네가 원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 헌신하고 있다. 이런 헌신이 과연 얼마나 실재적일 수 있겠는가? 네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 그것이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다. 너는 정말로 무에 헌신할 수 있겠는가?
104 하느님은 너에 대한 헌신으로 모든 것에 헌신하는 너를 창조하셔서, 네가 헌신할 대상을 주셨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완벽하게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재는 정녕 모든 것이며, 그러므로 너는 모든 것을 가졌다. 왜냐하면 너는 실재하기 때문이다. 너는 실재하지 않는 것은 만들 수 없다. 실재의 부재는 두려우며, 두려움은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 너는 창조하지 않을 것이다. 실재의 질서를 거스르면 실재를 무의미하게 만들겠지만, 실재야말로 정녕 의미다.
105 그러므로 기억하라. 하느님의 뜻은 이미 가능하고, 다른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실재를 왜곡하고도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실재를 왜곡한다면, 너는 불안과 우울을 느끼다가 결국에는 공황 상태를 경험할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느낄 때, 너 자신 너머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지 말라. 진리는 오로지 너의 내면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라:
106 그리스도는 나의 내면에 있으며,
그가 있는 곳에는 하느님도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