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텍스트
    • 오늘의 텍스트
    • 워크북
    • 교사용 지침서
    • 공지사항
    • 기적의 향기 책 구매
    • 기적수업 첫걸음
    • 기적수업 핵심 주제
    • 용서와 치유 나눔
    • 기적수업과 함께하는 여정
    • 자주 묻는 질문과 답
    • 기적수업 용어설명
    • 내 서재
피드백 보내기
  • 카페
  • 유튜브

Contact

대전시 유성구 지족동로 124
106-1901 기적의 향기

acimstudy.miraclepub@gmail.com

테마 색상
다크 모드

기적수업

서문
1장기적에 대한 안내
2장분리의 환상
3장마음의 재훈련
4장모든 악의 뿌리
5장치유와 온전성
6장공격과 두려움
7장왕국의 일관성
8장귀향
9장잘못의 교정
10장하느님, 그리고 에고
11장하느님의 구원 계획
12장죄의식 문제
13장지각에서 앎으로
14장환상을 진리로 가져오기
15장시간의 목적
16장환상을 용서하기
17장용서와 치유
18장꿈과 실재
19장몸 너머로
20장부활의 약속
21장내면의 그림
22장구원과 거룩한 관계
23장너 자신과의 전쟁
24장특별성과 분리
25장치료법
26장전이
27장몸과 꿈
28장두려움의 무효화
29장깨어나기
30장새로운 출발
31장구원의 단순성
기적수업
오늘의 텍스트📖 텍스트✏️ 워크북📚 교사용 지침서
0%· 약 11분

27. 죽음이란 무엇인가?

1 죽음은 그로부터 모든 환상이 비롯되는 핵심적인 꿈이다. 태어나서 나이 들고, 생기를 잃다가 결국 죽는 것이 생명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광기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전에 이러한 질문을 제기했지만, 이제 한층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죽으려고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믿음 가운데 유일하게 고착되고 변할 수 없는 믿음이다. 이것은 의문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연의 섭리"라고 여겨진다. 순환하는 것들, 변하고 불확실한 것들, 믿을 수 없고 불안정한 것들, 특정한 길에서 특정한 방법으로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는 것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선하신 창조주께서 과연 그렇게 뜻하실 수 있는지 묻는 자는 아무도 없다.

2 하느님이 우주를 이렇게 창조하셨다는 지각에서는, 하느님을 사랑 많으신 분으로 생각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져서 먼지와 실망과 절망으로 끝나야 한다고 명한 존재는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너의 하찮은 목숨을 실 한 가닥에 매달아 들고서, 아무런 후회나 배려도 없이 당장이라도 끊어버릴 태세다. 어쩌면 오늘 당장 말이다. 설령 기다린다 해도, 종말은 확실하다. 이러한 신을 사랑하는 자는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는 생명이 실제임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생명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의 세상은 이제 모순이 지배하고, 서로 적대하는 자들이 끝없는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다. 죽음이 있는 곳에, 평화는 불가능하다.

3 죽음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의 상징이다. 이 아이디어 안에서, 그분의 사랑은 잊힌다. 그것은 마치 태양을 가리려고 치켜든 방패처럼,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차단한다. 그 상징의 무시무시함은 그것이 하느님과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 상징은 하느님의 아들이 폐허의 품에서 "안식하기 위해 뉘어지며", 그곳에서 벌레들이 그를 기다렸다가 맞이하여 파괴함으로써 잠시 연명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벌레들도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파괴될 운명이다. 그러니 모든 것은 과연 죽음으로 인해 산다. 집어삼킴은 자연의 "생명의 법칙"이다. 하느님은 제정신이 아니고, 두려움만이 홀로 실제다.

4 죽어가는 것의 일부가 죽을 것과 무관하게 계속될 수도 있다는 희한한 믿음은 사랑 많으신 하느님을 선포하지 않으며, 그 어떤 신뢰의 근거도 재확립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든 죽음이 실제라면, 생명은 없다. 죽음은 생명을 부정하지만, 생명에 실재성이 있다면 죽음은 부정된다. 이것에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하다. 두려움의 신이 있거나, 아니면 사랑의 하느님이 계실 뿐이다. 세상은 천 번의 타협을 시도하고도 천 번을 더 시도할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도 하느님의 교사가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 그중 어느 하나도 하느님이 받아들이실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만들지 않으셨으므로, 죽음도 만들지 않으셨다. 그분께는 둘 다 똑같이 무의미하다.

5 죽음의 "실재성"은 하느님의 아들이 몸이라는 믿음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하느님이 몸을 창조하셨다면, 죽음은 정녕 실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더 이상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실 것이다. 실재세상에 대한 지각과 환상들의 세상에 대한 지각이 이보다 더 극명하게 대비되는 점은 없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죽음은 정녕 하느님의 죽음이다. 이제 하느님 자신의 창조물이 하느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분은 아버지가 아니라 파괴자다. 그분은 창조주가 아니라 복수하는 자다. 그분의 생각들은 과연 끔찍하고, 그분의 이미지는 무시무시하다. 그분의 창조물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죽는 것이다.

6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할 것은 죽음일 것이다." 물론이다! 죽음이라는 아이디어 없이는, 세상도 없다. 이 하나로 모든 꿈이 끝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마지막 목표, 모든 환상의 끝이다. 그리고 죽음 안에서, 모든 환상이 태어난다. 그 무엇이 죽음에서 태어나고도 여전히 생명을 가질 수 있겠는가? 반대로 그 무엇이 하느님에게서 태어나고도 여전히 죽을 수 있겠는가? 죽음에 매달리면서도 사랑이 실제라고 생각하려는 헛된 시도로서 세상이 조장하는 그 모든 모순과 타협, 의례는 효과도 없고 의미도 없는 어리석은 마법이다. 하느님은 존재하시며, 창조된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께는 대적자가 있어야 하고, 두려움은 사랑만큼이나 실재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겠는가?

7 하느님의 교사여, 너의 유일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이 한 역할을 담당하는 그 어떤 타협도 받아들이지 말라. 잔인함이 존재한다고 믿지도 말고, 공격이 너에게 진리를 가리도록 허용하지도 말라. 죽는 듯이 보이는 것은 단지 잘못 지각되어 환상으로 보내졌을 뿐이다. 이제 그 환상이 진리로 보내지도록 허용하는 것이 너의 과제가 되었다. 단지 이 점에 있어서 마음을 굳건히 하고, 변화하는 형식이 어떤 것이든 그것의 "실재성"에 속지 말라. 진리는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죽음과 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도 않는다. 죽음의 끝은 무엇인가? 하느님의 아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죄가 없다는 깨달음, 단지 이것뿐이다. 하지만 그 이하도 아님을 결코 잊지 말라.

362일차36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