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동안 지각을 강조하면서 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너는 그것들의 차이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지를 그렇게 조금만 다룬 이유는, 네가 무엇이든 알 수 있으려면 먼저 지각을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곧 확신하는 것이다. 불확실성이란 단지, 네가 알지 못함을 의미할 뿐이다. 앎이 곧 힘인 이유는, 앎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성은 곧 힘이다. 지각은 일시적일 뿐이다. 지각은 시공간 믿음의 한 속성이며, 따라서 두려움이나 사랑의 영향을 받는다. 그릇된 지각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참된 지각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둘 중 어느 것도 확실성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모든 지각은 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지각은 앎이 아닌 까닭이다.
31 참된 지각은 앎을 위한 토대이지만, 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확인이다. 너희의 모든 어려움은 궁극적으로 너희가 자신을, 서로를, 그리고 하느님을 인식하거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인식한다는 것은 "다시 알다."를 의미하며, 이것은 네가 전에는 알았음을 함축한다. 지각은 여러 다른 해석을 포함하므로 너는 많은 방법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지각이 온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적은 아는 방법이 아니라, 지각하는 방법의 하나다. 기적은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이지만, 네가 알 때는 전혀 질문하지 않는다.
32 환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환상을 무효화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단계다. 기적, 즉 "바른 대답"은 환상을 교정한다. 지각은 변하므로, 명백히 시간에 의존한다. 지각은 일시적인 상태를 면치 못하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가변성을 함축한다. 네가 특정한 시간에 지각하는 방법이 너의 행위를 결정하며, 행위는 반드시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앎은 무시간적이다. 왜냐하면, 확실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췄을 때, 너는 안다.
33 질문하는 마음은 자신을 시간 안에서 지각하며, 따라서 미래의 답을 구한다. 질문하지 않는 마음은 닫혀있다. 그 마음은 미래와 현재는 똑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변하지 않은 상태, 혹은 정체 상태를 확립한다. 이것은 대체로 미래가 현재보다 나쁠 것이라는 저변의 두려움에 대응하려는 시도다. 이러한 두려움은 질문하려는 경향 자체를 억제한다.
34 비전은 영안의 자연스러운 지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교정이다. 영안은 상징적이며, 따라서 앎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영안은 바른 지각의 수단이며, 이로써 영안은 기적 본연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제대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비전"은 계시라기보다는 기적이다. 지각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경험을 앎의 영역에서 배제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비전은 계속되지 않는다.
35 성서는 "너 자신을 알라." 혹은 확신하라고 가르친다. 확실성은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네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를 있는 그대로 지각한 것이며, 이로 인해 너는 그를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는 먼저 그를 인식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네가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는 동안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확실성에는 행위가 필요 없다. 네가 앎을 기반으로 행동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지각과 인지를 혼동하는 것이다. 앎은 정신적인 힘을 바른 행위를 위해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생각하기를 위해 동원한다. 지각과 기적과 행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앎은 계시의 결과이며, 오로지 생각만을 유발한다. 지각은 가장 영적인 형식을 취할 때조차 몸과 관련이 있다. 앎은 내면의 제단에서 나오며, 또한 확실하기에 시간을 초월한다. 진리를 지각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과 같지 않다.
36 너희가 서로의 잘못을 공격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될 것이다. 공격할 때 너희는 서로를 인식할 수 없다. 공격은 언제나 낯선 자에게 행해진다. 너는 그를 그릇되게 지각하여 낯선 자로 만들며, 그럼으로써 그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를 낯선 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너는 그를 두려워한다. 그를 바르게 지각하라. 그러면 너는 그를 알 수 있게 된다. 바른 지각이 먼저 있어야, 하느님은 비로소 당신의 아들들 안에 확립하신 당신의 제단들과 직접 소통하실 수 있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확실성을 전해주실 수 있고, 그분의 앎은 의문의 여지 없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37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들에게 낯선 분이 아니시며, 그분의 아들들도 서로에게 낯선 자가 아니다. 앎은 지각과 시간보다 먼저 있었고, 궁극적으로 그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고 묘사한 성서 구절의 진정한 의미다. 이것은 또한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나는 있다."라는 말을 설명해 준다. 지각은 안정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안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앎은 정녕 안정적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라는 말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확실성을 받아들여라."로 읽어야 한다.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 낯선 자들이란 없다. 네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창조하려면, 오로지 네가 알고 너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창조할 수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완벽한 확실성으로 아신다. 그분은 그들을 아심으로써 그들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그들을 완벽하게 인식하셨다. 그들이 서로를 인식하지 못할 때, 그들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