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공격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바로 여기서 두려움으로부터의 벗어남이 시작되어,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여기서 공포의 꿈 대신에 실재세상이 주어진다. 바로 이 근거 위에 용서가 놓여있으며, 바로 이 근거 위에서 용서는 자연스러울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공격받아 마땅하고 공격이 정당한 근거가 있는 곳에 용서를 베풀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네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간과함으로써 죄를 용서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것은 네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반응함으로써, 너의 용서가 이미 행해진 공격에 대한 응답이 될 것임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부적절하다. 그것은 마땅하지 않은 곳에 베풀어졌기 때문이다.
71 용서는 언제나 정당하다. 용서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 너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처벌을 요하는 진짜 공격을 간과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은 실제인 것에 적절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하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구원은 단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각하지 않음으로써 실제가 아닌 것에 적절하게 반응할 것만을 요청한다. 만약 용서가 정당하지 않다면, 너는 공격을 용서로 갚을 때 너의 권리를 희생하라고 요청받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너에게 단지,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용서를 바라보라고 요청할 뿐이다. 그 고통은 잘못에 근거하고 있기에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용서는 유일하게 제정신인 반응이다. 용서는 너의 권리가 희생되지 않도록 지켜준다.
72 이런 이해야말로 실재세상이 일어나 공포의 꿈을 대체하게 하는 유일한 변화다. 공격이 정당화되지 않는 한 두려움은 일어날 수 없으며, 만약 공격에 진짜 근거가 있다면 용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을 것이다. 네가 용서의 근거를 아주 실재적이며 충분히 정당하다고 지각할 때, 실재세상이 이루어진다. 용서를 부당한 선물이라고 여기는 동안에는, 용서는 네가 "용서하려는" 죄를 떠받칠 수밖에 없다. 정당화되지 않은 용서는 곧 공격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세상은 때로 "죄인들"을 용서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늘 자각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이 주는 용서를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다.
73 이것이 바로, 죄의식을 계속 살려두기 위해 세상이 사용하는 거짓 용서다. 그리고 세상은 하느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기에, 하느님의 용서가 진짜일 리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용서를 부당하다고 본 것의 확실한 결과다. 자신을 죄 있다고 보는 자는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용서할 수 있다면,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듯이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네가 만약 네 형제가 마땅히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면, 용서가 그의 권리듯이 너의 권리기도 하다는 것을 이미 배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 형제가 받을 이유가 없는 무시무시한 심판을 하느님이 너에게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마땅히 받을 몫은 그의 것보다 더 많을 수도, 더 적을 수도 없다는 것이 진리기 때문이다.
74 마땅히 받을 만하다고 인식된 용서는 치유할 것이다. 그러한 용서는 환상을 간과할 힘을 기적에 부여한다. 이것은 너도 마찬가지로 용서받았을 수밖에 없음을 배우는 방법이다. 간과될 수 없는 겉모습은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 먼저 용서가 미치지 못하는 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순한 실수 이상의 잘못, 즉 바뀔 수 없고 영원하며, 교정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특별한 형식의 잘못이 있어야 할 것이다. 창조를 무효화할 힘, 창조를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하느님의 뜻을 파괴할 힘을 가진 잘못이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오로지 이것이 가능할 경우에만, 기적을 견뎌내고 기적으로 치유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겉모습이 있을 수 있으리라.
75 용서가 치유할 수 없는 형식의 병과 슬픔이 있다는 믿음은 우상 숭배가 너의 소망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것은 네가 어떤 우상들은 계속 간직하기를 선호하여, 아직은 모든 우상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너는 어떤 겉모습은 실제며, 전혀 겉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겉모습은 다른 것보다 더 간과하기 어렵다는 고착된 믿음의 의미에 대해 속지 말라. 그것은 항상 네가 용서를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너는 부분적으로 사면하여 죄의식에서 제한적으로 탈출한다는 목표를 너를 위해 설정해 놓았다. 이것이 과연, 너와 떨어져 있는 듯한 모든 이와 너 자신에 대한 거짓된 용서 외에 무엇일 수 있겠는가?
76 기적이 모든 형식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기적은 치유할 수 없다. 어떤 형식이 실제고 어떤 겉모습이 참인지 판단하는 것이 기적의 목적일 수는 없다. 하나의 겉모습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어야 한다면, 하나의 환상이 진리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너는 모든 죄에서 벗어날 수 없고, 단지 어떤 죄에서만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전적으로 용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 자신에 대한 온전하지 않은 이미지를 계속 간직하고, 내면으로 눈을 돌려 모든 우상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발견하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구원은 용서할 수 없는 특정 형식의 죄는 있을 수 없다는 믿음에 달려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진리를 대체한 겉모습은 있을 수 없다.
77 네 형제를 있는 그대로 보겠다는 용의를 가지고 바라보라. 그가 치유되어야 한다는 너의 용의 바깥에 그의 일부를 남겨두지 말라. 치유하는 것은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온전한 것은 바깥에 남겨져 빠진 부분이 있을 수 없다. 용서는 이것을 인식하고, 기적이 치유할 힘이 없는 특정한 형식의 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기뻐하는 데 달려있다.
78 하느님의 아들은 완벽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느님의 아들일 수 없다. 네가 만약 하느님의 아들이 죄의 모든 형식과 모든 결과에서 마땅히 벗어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너 자신에 대한 진리를 알고자 한다면, 그를 오로지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79 아버지, 당신의 완벽한 아들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의 영광 속에서 저 자신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80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길 수 있는 악의 형식은 없다는 기쁨에 찬 진술이자, 환상을 실재화하려는 너의 소망에 의해 죄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꺼운 받아들임이다. 이것이 과연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81 이런 희망을 품고서 네 형제를 바라보라. 그러면 너는 그가 자신 안의 진리를 바꿀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아무런 결과도 주어지지 않은 실수를 간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너는 하느님의 아들을 우상으로 만들 힘을 가졌다고 여기는 것은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너에게 조상彫像이자 죽음의 징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너의 구원자인가?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잘못 알고 계시는가? 아니면, 너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치유하도록 주어진 형제를 네가 잘못 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