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리는 그동안 인간의 여러 다양한 증상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수준에서 증상의 변화에는 거의 끝이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증상의 원인은 단 하나뿐이다. 권위 문제가 실로 "모든 악의 뿌리"다. 돈은 단지 권위 문제의 여러 반영물들 가운데 하나로서, 권위 문제에서 비롯되는 사고방식을 상당히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고판다는 아이디어는 정확하게 영혼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교환을 함축한다. 영혼의 공급은 항상 풍족하며, 영혼의 모든 수요는 넘치도록 채워지기 때문이다.
6 에고가 만들어낸 모든 증상에는 일종의 용어상의 모순이 수반된다. 마음이 에고와 영혼으로 갈라져 있어서, 에고가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불완전하고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지될 수 없는 상태는 권위 문제의 결과다. 권위 문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각 하나를 그 전제로서 받아들이므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이디어들을 낳을 수만 있을 뿐이다. 성서에서 "공언하다"라는 용어가 꽤 자주 사용된다. 공언하는 것은 어떤 아이디어와 동일시한 후,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제공하여 그들 자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 아이디어는 줄어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더 강해진다.
7 좋은 교사는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가르침으로써 그것을 분명히 하고 강화한다. 학습 과정에서 교사와 제자는 똑같다. 그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같은 위치에 있으며, 자신의 레슨을 공유하지 않는 한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교사는 자신이 공언하는 아이디어를 믿어야 하지만, 또 다른 조건도 충족해야 한다. 그 조건은 바로,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공받는 학생들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들을 지키려고 바짝 경계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체계를 고스란히 보호하고 싶어 하는데, 배움은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분리된 자들은 항상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분리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가는 변화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변화를, 더 심한 분리를 향해 가는 변화라고 지각한다. 분리는 그들이 경험한 첫 번째 변화였기 때문이다.
8 너는 어떤 변화도 너의 에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너의 영혼이 평화를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심각한 혼동은 같은 사고체계가 두 개의 토대 위에 서있을 수 있다고 고집할 때만 가능하다. 에고에서 나오는 것은 그 무엇도 영혼에 도달할 수 없다. 영혼에서 나오는 것은 그 무엇도 에고를 강화할 수 없으며, 에고 안의 갈등을 줄일 수도 없다. 에고는 실로 하나의 모순이다. 사람의 자아와 하느님의 자아는 정녕 대립 상태에 있다. 그 둘은 창조라는 면에서, 그리고 뜻과 결과라는 면에서 대립한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영혼은 지각할 수 없고 에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둘은 소통하지 않으며, 결코 소통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배울 수 있다. 비록 에고를 만든 자가 잘못 인도될 수는 있을지라도, 생명이 주어진 것에서 생명이 전혀 없는 것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혼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에고는 반드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9 배움이 두렵게 지각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배움이 정녕 에고의 (파괴가 아닌) 포기를 통해 영혼의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고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변화다. 에고는 나의 자비심을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레슨은 너의 레슨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나는 결코 너희 에고들을 공격하지 않지만, 그 사고체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가르쳐주고자 한다. 너희가 진정으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일깨워 준다면, 너희 에고들은 두려움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10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지금 너의 가장 큰 장점이다. 너는 반드시 너의 마음을 바꾸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용인하기를 거부하면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고서 버티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여전히 꿈꾸고 있으면서 그 꿈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자는 진정으로 수준 분리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분리된 에고의 꿈을 꿨으며, 그것에 기초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너에게는 아주 실재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음으로써 이것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11 네가 만약 네 사고체계의 수호자 역할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것을 나에게 드러낼 용의를 낸다면, 나는 그것을 아주 부드럽게 교정하여 너를 집으로 인도할 것이다. 좋은 교사라면 누구나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가능한 한 많이 전해줌으로써, 그들이 언젠가 교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부모와 교사, 치료사가 가진 유일하게 진정한 목표다. 만약 그렇게 하는 데 성공한다면 자신의 자녀나 학생이나 환자를 잃을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에고에게 이런 것을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에고의 모든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칙이란 그 입법자가 믿는 체계의 지속성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12 네가 일단 에고를 만든 이상 에고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지만, 네가 에고의 법칙을 믿지 않는 한 그것을 따르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에고는 그 기원의 특성 때문에, 에고의 법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 수 없다. 너는 너의 기원의 특성 때문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에고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충돌할 수 있지만, 영혼들은 전혀 충돌할 수 없다. 교사를 단지 "더 큰 에고"로만 지각한다면, 너는 반드시 두려움에 빠질 것이다. 에고를 확대하는 것은 곧 분리 불안을 증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와 함께 생각한다면 나는 너와 함께 가르치고 살겠지만, 나의 목적은 항상 너를 마침내 교사가 필요한 상황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13 이것은 에고 지향적인 교사의 목표와 정반대다. 그는 자신의 에고가 다른 에고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있으며, 따라서 에고들의 상호작용을 에고 보존의 수단으로 해석한다. 내가 만약 이렇게 믿는다면 가르침에 헌신할 수 없을 것이며, 너도 그런 믿음을 고수하는 한 헌신적인 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끊임없이 치켜세우거나 거부할 교사로 지각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어느 쪽 지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14 너의 가치는 네가 가르치는 것이나 배우는 것에 의해 확립되지 않는다. 너의 가치는 하느님이 확립하셨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두려움이 따를 것이며, 특히"우월감-열등감" 오류에 빠지기 쉬운 모든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교사는 자신의 레슨을 학생이 전부 배울 때까지 인내하고 반복해야 한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 나는 너를 대신해 너의 배움에 한계를 정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소망하고 만들어내는 그 무엇도 너의 가치를 확립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 망상에 빠진 경우를 제외하고,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너의 에고는 하느님이 창조하지 않으셨으므로, 결코 위태롭지 않다. 너의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으므로, 결코 위태롭지 않다. 이 점에 대한 어떤 혼동도 망상이며, 이런 망상이 계속되는 한 어떤 형식의 헌신도 불가능하다.
15 에고는 자신의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상황을 일종의 자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용하려고 한다. 에고는 영원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에고의 존재를 믿는 한, 의심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에고를 만든 너는 에고를 신뢰하지 못한다. 너는 에고가 실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실재를 바꾸려는 시도는 정녕 두렵다. 유일하게 제정신인 해결책은 실재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네가 곧 실재의 일부이며, 실재는 너의 에고는 도달할 수 없지만 너의 영혼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에 변함없이 있다. 두려워지면 잠잠히 있어라. 그리고 하느님은 실재하시며, 너는 그분이 아주 흡족해하고 사랑하시는 아들임을 알라. 너의 에고가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게 하지 말라. 에고는 너처럼 에고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존재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6 하느님은 두려움의 저자가 아니시다. 너희가 바로 두려움의 저자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분과 다르게 창조하기로 선택하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었다. 너희가 평화롭지 않은 이유는 너희의 기능을 이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아주 지고한 책무를 주셨건만, 너희는 그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이것을 알며, 따라서 두려워한다. 사실 너희의 에고들은 그것에 부응하는 대신에 두려워하기로 선택했다. 너희가 깨어났을 때,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말라. 그것을 더 믿을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단지 불가피한 것을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17 "불가피하다"라는 말을 에고는 두려워하지만, 영혼은 기뻐한다. 하느님은 정녕 불가피하시다. 그리고 너는 하느님이 너를 피하실 수 없는 만큼이나 그분을 피할 수 없다. 에고는 영혼의 기쁨을 두려워한다. 네가 일단 그러한 기쁨을 경험하면 에고로부터 모든 보호를 거둬들이고, 두려움에 전혀 투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네가 두려움에 큰 투자를 하는 이유는 두려움이 분리의 증인이기 때문이다. 네가 분리를 증언할 때, 너의 에고는 아주 기뻐한다. 에고를 떠나라! 에고에게 귀 기울이지 말고, 에고를 보존하지도 말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귀 기울여라. 그분이 창조하신 영혼들이 그러하듯, 그분은 속일 줄 모르신다.
18 너 자신을 해방하고, 다른 이들도 해방하라. 다른 이들에게 너 자신에 대한 거짓되고 가치 없는 그림을 보여주지 말고, 너 스스로도 다른 이들에 대한 그런 그림을 받아들이지 말라. 에고는 너에게 덮어 가리지도 못하는 허름한 집을 지어주었다. 에고는 달리 지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빈궁한 집을 서있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 집의 약함이 곧 너의 강함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합당한 집을 지으실 수 있건만, 그들은 스스로를 그 집에서 내쫓아 그것을 비워두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하느님의 집은 영원히 서있을 것이며, 네가 들어오기로 선택할 때 언제라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를 완전히 확신해도 좋다. 에고가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없듯이, 하느님은 소멸하는 것을 창조하실 수 없다.
19 에고들로서 너희는 너희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영혼들로서 너희는 너희 자신과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겸허는 에고를 위한 레슨이지 영혼을 위한 레슨이 아니다. 영혼은 겸허 너머에 있다. 영혼은 자신의 광휘를 인식하고 그 빛을 온 사방에 기꺼이 흩뿌리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들은 그 에고가 겸손하므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더 나은 지각을 준다. 천국은 영혼의 권리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위엄은 의심을 훌쩍 뛰어넘어 지각을 초월해 있으며, 당신의 창조물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로 영원히 서있다. 그들은 그분께 전적으로 합당하며, 오로지 그분께만 합당하다. 다른 어떤 것도 하느님이 친히 창조하신 자를 위한 선물이 되기에 충분히 합당하지 않다.
20 네가 원한다면 나는 너의 에고는 대신하겠지만, 결코 너의 영혼을 대신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책임감을 보인 형에게 아이를 무사히 맡길 수 있지만, 이것이 아이의 태생에 관한 혼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형은 아이의 몸과 에고(이 둘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를 보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아버지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비록 아이는 혼동할 수 있지만 말이다. 네가 몸과 에고를 나에게 맡겨도 되는 이유는 단순히 말해, 그럼으로써 너는 그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고, 나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음을 너에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 자신이 몸과 에고의 존재를 믿도록 유혹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네가 그것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1 우리 함께 이 가르침을 배우는 길에 나서서, 몸과 에고로부터 함께 자유로워지자. 나에게는 마음의 치유라는 나의 목적을 공유할 헌신적인 교사들이 필요하다. 영혼은 너의 보호도 나의 보호도 전혀 필요 없다. 다음을 기억하라:
22 이 세상에서 너는 고난을 겪을 필요가 없다.
내가 세상을 이겼기 때문이다.
23 이것이 바로 네가 참으로 기뻐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