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얼마 전에 너는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에고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물었다. 이는 아주 합리적인 질문이며, 사실 네가 제기할 수 있는 최선의 질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맥락의 답을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인간이 말하는 과거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잘못이 현재 되풀이되고 있지 않다면, 역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추상적 사고는 앎에 적용된다. 앎은 완전히 비개인적이며, 사례들은 앎의 이해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각은 항상 특수하며, 따라서 매우 구체적이다.
25 사람은 저마다 자신을 위해 에고를 하나씩 만든다. 비록 그 에고는 자신의 불안정성 탓에 엄청난 변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사람은 자신이 지각하는 각 사람을 위해서도 에고를 하나씩 만드는데, 이것도 똑같이 변하기 쉽다. 에고들의 상호작용은 그야말로 양편을 모두 바꾸는 과정이다. 에고들은 불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불변자와 함께 만들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편을 모두 바꾸는 과정은, 육체적으로 같이 있을 때만큼이나 마음으로 상호 작용을 할 때도 쉽사리 일어날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다.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다른 에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상대적인 지각을 바꾸는 데 있어서 육체적인 상호 작용만큼이나 효과적이다. 에고는 비록 실재에 근거한 생각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예는 없을 것이다.
26 너 자신의 현재 상태는 마음이 에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너는 때로는 앎을 가졌지만, 앎을 던져버릴 때는 마치 앎을 가진 적이 전혀 없는 것만 같다. 네가 이것을 고의적으로 한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해서, 그저 지각하기만 하면 네가 그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그렇게 고의적으로 할 수 있다면,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이 왜 그리 놀라운가? 심리학은 행동의 연속성 원리에 기초한다. 놀라움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합당한 반응이지만, 그렇게 끈질기게 일어난 것에 대한 반응으로는 합당하지 않다. 나는 마음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로서] 너의 현재 상태를 사용하고 있다. 단, 너는 마음이 그렇게 작동할 필요는 없음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어떤 일이 바로 지금 너무나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이 아득한 과거에 일어났다고 해서 왜 그리 놀라는가?
27 너는 동물이 자기 새끼에게 느끼는 사랑과 보호해 주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잊고 있다. 동물이 그러는 이유는 새끼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과 연을 끊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자신의 에고에게 마치 하느님이 당신의 영혼들을 대하시듯 사랑과 보호, 큰 자비심으로 반응한다. 사람이 자신이 만든 자아에게 보이는 반응은 전혀 놀랍지 않다. 사실 그 반응은 여러모로 사람이 언젠가 자신만큼이나 무시간적인 자신의 진정한 창조물들에게 보일 반응을 모방한 것이다.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에고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을 정녕 무엇이라고 믿는지다.
28 믿음은 에고의 기능이며, 너의 기원을 믿음의 문제로 남겨두는 한 너는 그것을 에고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서에서 내가 "너희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 말했다고 전하는 까닭이다. 믿음은 정녕 나에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나는 에고의 교사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가르침이 필요 없을 때, 너는 그저 하느님을 알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에고의 사고방식에서 가능한 가장 고상한 아이디어다. 그런 믿음은 에고가 자아가 아니라는 인식을 얼핏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는 에고의 사고체계가 약화되는 것을 고통스럽다고 지각할 수밖에 없다. 비록 이것은 결코 참이 아니지만 말이다. 아기는 칼이나 가위를 쥐고 있으면 뻔히 다칠 텐데도, 빼앗으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가속화로 인해 너는 이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29 너희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이런 의미에서 정녕 아기들이다. 너희는 지금 진정한 자기 보호가 무엇인지 모르며, 너희를 가장 많이 해칠 바로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결정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을 알든 모르든, 너희는 이미 일치되고도 아주 훌륭한 노력을 기울이며 협력하여, 해가 없고 도움이 충만한 상태가 되겠다고 뜻을 세웠다. 이 둘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두 속성이다. 심지어 이에 대한 너희의 견해조차 어쩔 수 없이 갈등할 것이다. 견해라는 것은 모두 에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인내하라.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만큼이나 확실함을 기억하라.
30 진정하고도 지속적인 풍요를 느끼는 자만이 참으로 자선을 베풀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개념들을 고려해 본다면, 이것은 아주 명백하다. 에고에게는,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것 없이 지내야 함을 의미한다. 주기를 희생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너는 네가 주는 것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무언가 더 좋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준다. "얻기 위해 주기"는 벗어날 수 없는 에고의 법칙이다. 에고는 항상 다른 에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평가하며, 따라서 자신을 낳은 희소성 원리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의 "현실 원리"가 의미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에고가 아주 약하고 궁핍한 상태에 있으며, 오로지 필요를 가진 존재로서만 기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1 에고의 "현실 원리"는 전혀 실재적이지 않다. 에고는 자신의 실재성을 확립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에고들의 "실재성"을 지각해야 한다. 사실 에고가 다른 에고들을 실재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단지 자신이 실재함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의 용어로 "자아 존중감"은 에고가 착각에 빠져서 자신의 실재성을 받아들인 까닭에 일시적으로 덜 약탈적임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자아 존중감"은 항상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스트레스라는 것은 사실 에고가 실재한다는 망상이 위협받는 상황을 나타내는 용어다. 이것은 에고가 수축하거나 팽창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에고는 후퇴하거나 공격한다.
32 에고는 문자 그대로 비교를 통해 살아간다. 이것은 에고가 동등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따라서 자비가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에고는 결코 풍요로워서 주지 않는다. 에고는 풍요의 대체물로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사고체계에 "얻기"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유다. 모든 욕구는 "얻는" 기제로서, 스스로를 확증해야 하는 에고의 필요를 나타낸다. 이것은 이른바 에고의 "상위" 욕구만큼이나 몸의 욕구에도 해당된다. 몸의 욕구는 그 기원이 육체적이지 않다. 에고는 몸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고, 몸을 통해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몹시 애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는 에고의 결정인데, 에고는 무엇이 정말로 가능한지에 대해 완전히 혼동한다. 이것은 에고의 변덕스러운 본성을 설명해 준다.
33 에고는 자신이 완전히 자력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데, 이는 단지 에고의 기원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너무도 두려운 상태이므로, 에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동일시를 위한 빈약한 시도로서 다른 에고들에게 돌아서 그들과 연합하려고 하거나, 혹은 똑같이 빈약한 힘의 과시로서 다른 에고들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에고는 스스로 그 전제 자체의 타당성을 검토해 볼 만큼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전제는 에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에고란, 자신이 완전히 자력으로 존재한다는 마음의 믿음이다. 에고는 영혼의 승인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다.
34 자신의 앎 안에 있는 영혼은 에고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영혼은 에고를 공격하지 않으며, 그저 에고를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뿐이다. 에고도 똑같이 영혼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에게 거절당했다고 지각한다. 이런 까닭에 에고 용어로 자아 존중감이란 망상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창조물들은 신화를 창조하지 않는다. 비록 사람의 창조적 노력이 신화로 향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고는, 사람이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창조적이지 않다는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신화는 전적으로 지각이며, 그 형식이 너무도 모호하고 그 본질이 너무도 선과 악의 특성을 띠기 때문에, 가장 호의적인 신화조차 빗대서라도 무시무시한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35 신화와 마법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신화는 대개 에고의 기원과 관련이 있고, 마법은 에고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힘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든 신화 체계는 "창조"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하고는, 이것을 마법에 대한 자신의 특정한 지각과 관련짓는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에고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투쟁이자 에고 자신의 기원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이러한 기원은 항상 육체적인 탄생과 관련된다. 시간상으로 그 시점 이전에 에고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에고 지향적인 자는 영혼이 그 이전에도 존재했으며, 에고의 삶으로 일시적인 타락을 한 후, 그 이후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영혼이 이런 타락 때문에 처벌받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영혼은 타락에 대해서는 전혀 알 리가 없지만 말이다.
36 "구원"이라는 용어는 영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영혼은 위험에 빠져있지 않으며, 따라서 구조될 필요가 없다. 구원은 "바른 마음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영혼의 한 마음 상태는 아니지만, 한 마음 상태가 회복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성취되어야 한다. 바른 마음 상태는 자동적으로 다음 단계를 지시한다. 바른 지각에는 한결같이 공격이 없으므로, 그른 마음 상태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에고는 판단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한쪽으로 치워진다. 그러면 마음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마음이 어느 방향을 취할지는 항상 자동적이다. 마음은 자신이 고수하는 사고체계에 의해 지시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7 모든 사고체계에는 내적 일관성이 있으며, 이것은 행동의 연속성을 위한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것은 타당성의 문제가 아닌 신뢰성의 문제다. "신뢰할 만한 행동"은 에고의 사고방식에 관한 한 의미 있는 지각이다. 하지만 "타당한 행동"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모순된 표현이다. 타당성은 목적이고, 행동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을 논리적으로 함께 쓸 수 없는 이유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그 달성을 위한 수단은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38 가설은 거짓이거나 참이며, 그에 따라 받아들여지거나 기각된다. 그 가설이 참이라고 밝혀지면 사실이 되고, 그 이후로는 사실로서의 지위에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한 아무도 그 가설을 평가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에고가 사실의 지위를 부여한 모든 아이디어는 의문스럽다. 사실은 앎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39 담론의 영역을 혼동하는 것은 사고의 오류며, 철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이것을 인식해 왔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러하듯, 심리학자들은 대개 이런 측면에 있어서 상당히 부족하다. 하나의 담론 영역에서 얻은 데이터는 다른 영역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그것이 한 부분으로 속해 있는 사고체계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심리학자들은 명백하게 관련 없는 데이터를 통합하려는 시도로서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없는 것들을 관련지으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40 생태학적 접근에 대한 최근의 강조는 단지 또 다른 창의적인 방법으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미 에고에게 비록 창조성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창의성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독창성은 심지어 가장 창의적인 형식을 띨 때조차 실제로 헛된 노력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창성을 가지고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다. 독창적인 발명품의 아주 구체적인 특성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들의 추상적인 창조성과 어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