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공격은 항상 육체적이다. 네가 어떤 형식으로든 공격을 너의 마음에 들인다면, 너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몸에 대한 에고의 해석이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위해 반드시 육체적으로 공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을 공격이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공격이라는 아이디어는 너에게 아무런 매력도 갖지 못할 것이다. 너 자신을 몸과 동일시한다면, 너는 항상 우울함을 느낄 것이다. 하느님의 아이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고 자신의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왜소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로지 형제들 안에서만 자신을 찾을 수 있으므로, 자기 자신을 구원으로부터 차단한 것이다.
54 성령은 몸을 오로지 소통 수단으로만 해석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성령은 하느님과 그분의 분리된 아들들을 잇는 소통 고리로서, 네가 만든 모든 것을 자신의 정체에 비추어 해석한다. 에고는 몸을 통해 분리한다. 성령은 몸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간다. 너는 네 형제들을 성령이 지각하듯이 지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몸들과 너의 몸은 단지 그들의 마음들을 결합하여 그것들을 너의 마음, 그리고 나의 마음과 연합하기 위한 수단이건만, 너는 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몸의 가치에 대한 너의 마음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다. 그 자체로는, 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55 공격을 위해 몸을 사용한다면, 몸은 과연 너에게 해롭다. 자신이 몸이라고 믿는 자들의 마음에 다가가 몸을 통해 그렇지 않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만 몸을 사용한다면, 너는 너와 상대방 안에서 마음의 권능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네가 오로지 이것만을 위해 몸을 사용한다면, 몸을 공격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연합을 위해 사용될 때, 몸은 영적 교통에 관한 아름다운 레슨이 된다. 이것은 영적 교통이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 가치가 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식으로 네가 제한한 것을 무한하게 만드신다. 성령은 몸을 네가 보듯이 보지 않는다. 어떤 것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실재성은, 하느님이 주신 기능을 위해 그것이 그분께 드릴 수 있는 봉사임을 알기 때문이다.
56 소통은 분리를 끝낸다. 공격은 분리를 조장한다. 몸은 부여받은 용도에 따라 아름답거나 추하고, 거룩하거나 야만적이며, 유익하거나 해롭다. 그리고 너는 다른 사람의 몸에서 너 자신의 몸에 부여한 용도를 볼 것이다. 네가 몸을 단지 성령께 드려 온아들의 연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한다면, 너는 육체적인 것들을 그 정체대로만 볼 것이다. 몸을 진리를 위해 사용한다면, 너는 몸을 진정으로 보게 될 것이다. 몸을 잘못 사용한다면, 너는 반드시 몸을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몸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이미 몸을 잘못 이해한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어떤 것이든 성령과 별개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불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를 증오와 공격, 평화의 상실로 데려갈 것이다.
57 하지만 모든 상실은 단지 너 자신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될 뿐이다. 어떤 종류의 상실도 불가능하다. 네가 어떤 형제를 육체적인 개체로 바라볼 때, 그의 권능과 영광이 너에게 상실되며, 따라서 너의 권능과 영광도 그렇게 된다. 너는 그를 공격했지만, 너 자신을 먼저 공격했음에 틀림없다.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를 이런 식으로 보지 말라. 너의 구원은 그에게 그의 구원을 가져다줄 것이다. 너의 마음 안에서 그가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도록 허락하지 말고, 그를 왜소함에 대한 믿음에서 해방함으로써 너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라. 너의 일부로서, 그는 거룩하다. 나의 일부로서, 너는 거룩하다. 하느님의 일부와 소통하는 것은, 하느님이 너의 일부로 확립하신 그분의 음성을 통해 왕국을 넘어 그 창조주께 도달하는 것이다.
58 그러니 너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기뻐하라. 너는 너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너는 정녕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며, 그분은 너를 위해 너의 권능과 영광을 뜻하셨다. 너 스스로 그것들을 뜻할 때, 너는 그것들을 가지고 너를 위한 그분의 거룩한 뜻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 있다. 하느님은 네게서 당신의 선물들을 거두지 않으셨지만, 너는 그분에게서 그 선물들을 거둬들였다. 하느님의 이름을 위해, 그분의 단 한 명의 아들도 감춰져 있게 버려두지 말자. 그분의 이름은 곧 너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59 성서에 "말씀(혹은 생각)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쓰여 있음을 기억하라. 엄격히 말하자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치 한 등급의 실재가 다른 등급의 실재로 전환되었다는 의미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등급의 기적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실재의 다른 등급들은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각은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육신이 될 수 없다. 생각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은 정녕 소통이며, 몸은 정녕 소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몸에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용도다. 몸을 부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성령의 목적을 잊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의 커리큘럼 목표를 혼동하는 것이다.
60 학습자가 자신이 배울 수 없는 커리큘럼에 배치되는 것만큼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커리큘럼을 배우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서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학습 상황에,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와는 상관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일이다. 사실 그것은 세상이 너를 우울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이유다. 성령의 커리큘럼은 결코 우울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쁨의 커리큘럼이기 때문이다. 배움에 대한 반응이 우울이라면, 그 이유는 단지 네가 커리큘럼의 목표를 잊었기 때문이다.
61 이 세상에서는 몸조차도 온전하다고 지각되지 않는다. 몸의 목적은 서로 관계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많은 기능들로 조각나 있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몸은 혼란의 지배를 받는 듯이 보인다. 에고가 안내하면, 몸은 정녕 그렇다. 성령이 안내하면, 몸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단지 네가 너의 영혼으로부터 분리했던 마음 부분이 자신의 왜곡 너머로 뻗어나가 영혼에게 돌아가는 수단이 된다. 이와 같이, 에고의 사원이 성령의 사원이 된다. 그곳에서, 성령에 대한 헌신이 에고에 대한 헌신을 대체한다. 이런 의미에서 몸은 정녕 하느님께 바치는 사원이 된다. 그분의 음성이 몸의 용도를 지시함으로써 몸에 머물러 살기 때문이다.
62 치유란 몸을 오로지 소통을 위해서만 사용한 결과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몸은 온전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치유된다. 그리고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마음은 온전하며, 따라서 마음의 일부가 물질적이라거나 혹은 마음이 아니라는 믿음은 조각난 (혹은 병든) 해석이다. 마음은 물질적으로 될 수 없지만, 자신 너머로 가기 위해 몸을 사용한다면, 물질적인 것을 통해 드러나게 될 수는 있다. 마음은 밖으로 뻗어나감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장한다. 마음은 몸에서 멈추지 않는다. 만약 마음이 몸에서 멈춘다면, 마음의 목적은 가로막힌 것이기 때문이다. 가로막힌 마음은 자신이 공격에 취약해지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63 그렇다면 이러한 장애물의 제거야말로 도움과 치유를 보장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도움과 치유는 몸의 안에서가 아니라 몸을 통해 작용하는 마음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마음이 몸을 자신의 목표라고 믿는다면, 몸에 대한 자신의 지각을 반드시 왜곡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몸 너머로 확장하는 것을 가로막음으로써, 분리를 조장하여 병을 일으킬 것이다. 몸을 분리된 개체로 지각하는 것은 병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통 수단이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 유용성을 상실할 것이다. 소통 수단을 공격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목적에 대한 명백한 혼동이다.
64 소통은 결합이고, 공격은 분리다. 똑같은 것을 가지고 동시에 둘 다 하면서 어떻게 고통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에 대한 지각은 유일한 목적에 의해서만 통일될 수 있다. 그러면 마음은 몸을 여러 관점에서 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몸이 진정으로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에게 전적으로 몸을 맡기게 된다. 학습 도구를 커리큘럼의 목표와 혼동하는 것은 근본적인 혼동이다. 배움이 자신의 도구에 의해 붙잡혀 있는 한, 그 도구와 배움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리라고 바랄 수는 없다. 배움은 몸을 넘어서서, 그 안에 있는 마음의 권능을 재확립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마음이 다른 마음들로 확장함으로써 자신의 확장을 붙잡아 두지 않는 경우에만 성취될 수 있다.
65 마음의 확장을 붙잡아 두는 것은 모든 병의 원인이다. 오로지 확장만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기쁨의 반대는 우울함이다. 배움이 기쁨 대신 우울함을 조장한다면, 너는 하느님의 기쁜 교사에게 귀 기울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너는 분명 잘못 배우고 있는 것이다. 몸을 순수한 확장의 수단 외에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은 너의 마음을 제한하고 너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이란 단지 통합된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몸을 마음의 목적 아래로 가져오면, 몸은 온전해진다. 마음의 목적이 이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공격이란 단지 몸이 가졌다고 추정된 목적일 뿐이다. 몸에는 마음과 별개의 어떤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66 너는 몸에 의해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생각은 육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마음이 몸 너머로 가면서 몸을 한계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몸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몸에 제한되어 있거나 몸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고 볼 때마다, 너는 그런 한계를 너 자신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네가 배우는 목적은 오로지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너는 이런 한계를 자진해서 받아들이려는가? 몸을 공격의 수단이라고 여기면서, 그 결과로 어쩌면 기쁨을 얻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서툰 학습자라는 명백한 지표다. 그는 커리큘럼의 통합된 목적에 완전히 상반되는 학습 목표를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그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스스로 해치고 있다.
67 기쁨은 통합된 목적이며, 통합된 목적은 오로지 하느님의 목적뿐이다. 너의 목적이 통합되어 있을 때, 그것은 정녕 하느님의 목적이다. 네가 그분의 목적을 방해한다면, 너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너는 너 자신을 정죄했지만, 정죄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죄는 참이 아니다. 네가 내린 정죄의 모든 결과도 마찬가지로 참이 아니다. 어떤 형제를 몸으로 볼 때, 너는 이미 너 자신을 정죄한 까닭에 그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정죄는 공격의 형식이므로 분명 실제가 아니며, 정죄가 실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결과도 낳을 수 없다.
68 참이 아닌 것의 결과 때문에 너 자신이 고통받도록 허락하지 말라. 이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에서 너의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어라. 그것의 완전한 불가능성에,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불가능성에 대한 너의 충분한 자각에, 너의 해방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 놓여있다. 그런데 너는 다른 어떤 희망을 원하려는가? 환상으로부터의 자유는 오로지 환상을 믿지 않는 것에 놓여있다. 너의 믿음이 없다면, 환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격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한 없는 소통은 존재하며, 따라서 제한 없는 권능과 온전성도 존재한다. 온전성의 권능은 확장이다. 너의 생각을 이 세상에 붙잡아 두지 말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하느님 안의 창조에 활짝 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