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몸에 대한 견해는 공격에 대한 견해다. 모든 것에 대한 에고의 정의는 유치하며, 항상 어떤 사물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에고의 믿음에 근거한다. 에고는 일반화를 제대로 할 능력이 없으며, 자신이 보는 것을 자신이 그것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기능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것의 정체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에고에게 몸은 공격의 도구다. 에고는 너를 몸과 동일시하기에, 네가 곧 공격의 도구라고 가르친다. 에고는 바로 이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은 몸 자신의 건강을 낳는 근원이 아니다. 몸의 상태는 오로지 몸의 기능에 대한 너의 해석에 달려있다.
70 기능이라는 면에서 내리는 정의가 열등한 이유는, 그것이 흔히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기능은 존재에서 발생하므로 존재의 일부이지만, 그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 전체는 부분을 정의하지만, 부분은 전체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각에 해당되듯이 앎에도 해당된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전체적으로 아는 것인 이유는, 앎과 지각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지각의 경우 전체는 부분들로 구축되며, 부분들은 흩어졌다가 다른 배열로 재조립될 수 있다. 앎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따라서 앎의 배열은 영구적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어떤 의미라도 있는 유일한 영역은 변화가 가능한 영역이다. 변화가 불가능한 곳에서,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71 몸은 몸을 소유하려고 다투는 두 음성이 있는 듯한 세상에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지각되는 배열 상태에서는, 몸이 자신에 대한 통제권을 한 음성에서 다른 음성으로 옮김으로써 건강과 병의 개념 둘 다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여겨진다. 늘 그러하듯, 에고는 수단과 목적을 근본적으로 혼동한다. 몸을 목적으로 여기는 에고에게는 몸의 진정한 용도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몸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그동안 에고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모든 목적의 뚜렷한 특징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가 그런 목적을 이루었을 때, 그것은 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끊임없이 한 목적에서 다음 목적으로 옮겨가도록 압박받는 이유다. 그리고 그 결과 너는 에고가 너에게 아직도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계속 기대할 것이다.
72 그동안 너는 몸이 목적이라는 에고의 믿음을 극복하는 것을 특히 어려워했다. 이것은 공격이 목적이라는 믿음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에고는 병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네가 만약 아프다면, 너는 상처받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에고의 확고한 믿음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에고의 관점에서 보자면 특히 매력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병의 저변에 있는 명백한 공격을 덮어 가려주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공격하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에고를 편드는 이런 거짓 증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73 네가 병을 거짓 증인이라고 지각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병이 네가 원하는 것과 전혀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증인은 결백하고 믿을 만해 보인다. 왜냐하면, 너는 아직 이 증인을 진지하게 반대 심문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반대 심문을 해본다면, 병이 에고의 관점을 그렇게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74 보다 정직한 진술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에고를 원하는 자들은 에고를 변호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선택한 증인을 처음부터 의심해 봐야 한다. 에고는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증인은 부르지 않으며, 그것은 성령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앞에서 판단은 정녕 성령의 기능이며, 성령은 이 기능을 이행할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에고는 무엇에든 단지 편파적인 판결만 내리는 재판관이다. 에고가 증인을 부를 때는, 그를 이미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다.
75 그 자체로 몸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다는 점은 여전히 사실이다. 몸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고는 몸을 목적으로 세우는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몸이 자신의 진정한 기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가 하는 모든 것의 목적이다. 에고의 유일한 목적은 모든 것의 기능을 보지 않는 것이다. 아픈 몸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이 의미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몸은 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이 의미가 있으려면, 몸에 대한 에고의 해석이 근거하는 기본적인 두 가지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몸이 공격을 위한 것이라는 전제와, 너는 몸이라는 전제다. 이 전제들이 없다면, 병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76 병은 네가 해를 입을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병은 네가 연약하고 취약하며, 철저하게 외적인 안내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에고는 너에게 에고의 안내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최고 논거로 병을 사용한다. 에고는 파멸적인 결과를 피하기 위한 처방전을 끊임없이 내린다. 똑같은 데이터를 완벽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성령은 그것을 분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데이터가 무의미하다면, 그것을 검토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진리의 기능은 참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데이터를 가지고 이치에 맞게 만들려는 시도는 소용없는 일이다. 그 데이터를 어떻게 다루든, 그 결과는 무다. 그 결과가 복잡해질수록 그것이 무임을 인식하기가 더 어려워지겠지만, 전제들이 낳는 가능한 결과를 전부 검토해야만 전제들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77 학습 도구는 교사가 아니다. 그것은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말해줄 수 없다. 너는 에고의 혼동을 받아들인 탓에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학습 도구가 너에게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병이란 단지, 답을 알지 못하는 교사의 안내를 네가 고집스레 요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에고는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전에 우리가 에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에고에 관해 전적으로 참인 유일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앎이 존재이고 에고는 앎을 갖고 있지 않다면, 에고는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
78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음성이 어찌 그리 집요할 수 있느냐고 당연히 물을 만하다.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왜곡하는 힘을 가졌는지 진지하게 숙고해 본 적이 있는가? 비록 그것이 참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동안 네가 원하는 것이 네가 보고 듣는 것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 누구도 에고가 거짓 사례들을 축적하는 기술을 의심할 수 없다. 또한 그 누구도, 네가 진리 외에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을 때까지는 에고에게 기꺼이 귀 기울이려 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네가 에고를 내려놓을 때, 에고는 사라질 것이다. 성령의 음성은 네가 귀 기울이려는 용의만큼 크다. 그것은 너의 뜻을 침해하지 않고서는 그보다 더 커질 수 없다. 성령은 너의 뜻을 자유롭게 풀어주려고 할 뿐, 결코 명령하려고 하지 않는다.
79 성령은 너에게, 오로지 네 형제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만 몸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그럼으로써 성령은 너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가르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을 치유할 것이며, 따라서 너를 치유할 것이다. 성령이 보는 대로의 기능에 따라 사용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플 수 없다. 그와 다르게 사용되는 것은 무엇이든 아프다. 몸이 분열된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허락하지 말라. 몸이 네가 지각하는 왜소함의 이미지가 되도록 허용하지 말라. 몸이 너의 공격하려는 뜻을 반영하도록 허용하지 말라. 성령은 그 무엇에서도 공격을 지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성령께 어떤 것에 대한 해석을 맡겼을 때, 그것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바로 건강이다. 건강이란, 몸을 사랑 없이 사용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결과다. 건강이란, 생명이 무엇인지 아는 유일한 교사의 안내 아래 생명을 바른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생명 자체를 위한 음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