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에고의 용서 계획이 하느님의 용서 계획보다 훨씬 더 널리 사용된다. 그 계획은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들에 의해 이행되며, 따라서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에 대해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정의상,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는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주려고 시도한다. 그가 신학자라면, "나는 비참한 죄인이고 당신도 그렇습니다."라는 전제로 시작할 것이다. 그가 심리치료사라면, 자신은 공격을 정말로 믿으며 환자도 그렇지만, 어느 경우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똑같이 믿기 힘든 아이디어로 시작할 가능성이 더 높다.
21 우리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에고의 믿음들은 공유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그것들이 실제가 아닌 이유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믿음들을 "드러냄으로써" 실제인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진리를 구하여 판타지를 뒤지는 치유사는 치유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는 진리를 찾으려면 어디를 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따라서 치유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악몽을 의식 안으로 가져오는 것에 이점은 있지만, 악몽은 실제가 아니며 악몽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무의미함을 가르치기 위한 경우에만 그러하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는 이것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없다.
22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들은 모두 이런저런 형식을 취한 에고의 용서 계획을 따른다. 그들이 신학자라면, 그들 자신을 정죄하고, 정죄를 가르치며, 아주 무시무시한 해결책을 옹호하기 십상이다. 그들은 정죄를 하느님께 투사하여 그분을 복수심에 불타는 분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분의 응징을 두려워한다. 사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먼저 에고와 동일시한 다음에, 에고가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지각함으로써, 이런 심각한 혼동 때문에 그들 자신을 정죄한 것에 불과하다. 그동안 이런 개념에 맞선 저항이 있었음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 개념에 맞서 저항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개념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항의 내용이 아닌 형식이 다른 것이다.
23 보다 새로운 형식을 취한 에고의 용서 계획도 이전의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식은 성령께 중요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다 새로운 형식의 에고 계획에 따르자면, 치료사는 악몽에 나오는 에고의 상징들을 해석한 다음, 그것을 사용해서 악몽이 실제라고 증명한다. 치료사는 이렇게 악몽을 실제인 것으로 만든 다음, 꿈꾸는 자의 중요성을 격하함으로써 악몽의 결과를 물리치려고 한다. 만약 꿈꾸는 자를 실제가 아닌 것으로 제대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치유적인 접근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꾸는 자를 마음과 동일시한다면, 성령을 통해 교정하는 마음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24 이것은 심지어 에고가 보기에도 모순이며, 에고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조차 일반적으로 주목하는 모순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두려움에 대응하는 방법이 두려워하는 자의 중요성을 축소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어찌 에고 강함을 축적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자명한 이런 불일치점들이야말로, 틀에 박힌 몇몇 자구상의 설명을 제외하고는, 심리치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 누구도 분명히 밝히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사실, 실재적인 것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적인 것은 아무것도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그 자신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운다.
25 그의 에고가 그 상황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거기서 어떤 지지를 얻어내려고 한다. 치유되지 않은 치유사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기에 주는 법을 모르며, 그 결과 공유할 수 없다. 그는 교정적으로 작업하지 않으며, 따라서 교정할 수 없다. 그는 무엇이 실제인지 환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믿지만, 자기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하시자 빛이 있었다. 심리치료사처럼 어둠을 분석하거나, 혹은 신학자처럼 자신 안에서 어둠을 인정한 다음에 그것을 없애기 위해 멀리 있는 빛을 구함으로써 과연 빛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그 먼 거리를 강조하면서 말이다.
26 치유는 신비롭지 않다. 네가 그것을 이해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빛은 곧 이해이기 때문이다. "비참한 죄인"은 마법 없이는 치유될 수 없고, "중요하지 않은 마음"도 마법 없이는 자신을 중히 여길 수 없다. 그렇다면 에고가 채택하는 이 두 가지 형식의 접근법은 모두 막다른 골목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에고가 너를 항상 데려가는 특유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환자에게 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지적해 주는 것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그러한 지적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러한 치료사는 환자를 대신해서 그의 방향을 바꿔줄 수 없지만, 자기 스스로도 방향을 바꿀 수 없다.
27 치료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여는, 자기 스스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더 이상 어떤 악몽도 믿지 않는 자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그에 따라 치료사의 마음 안에 있는 빛이 질문자에게 응답할 것이며, 그러면 질문자는 빛이 정녕 있다고 하느님과 함께 결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빛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자가 이렇게 치료사 안의 빛을 인정해 줌으로써, 치료사도 자신 안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런 방법으로, 지각이 결국 앎으로 전환된다. 기적일꾼은 빛을 지각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그 빛을 확장하고 그 빛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지각을 확실성으로 전환한다. 그는 빛의 결과들을 통해 자신에게 빛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28 치료사는 치유하지 않는다. 그는 치유가 있도록 허용할 뿐이다. 그는 어둠을 가리킬 수 있지만, 스스로 빛을 가져다줄 수는 없다. 빛은 그에게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은 그를 위한 것이므로, 또한 그의 환자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성령이 유일한 치료사다. 성령은 자신이 안내자 역할을 하는 모든 상황에서 치유를 더없이 확실하게 만든다. 인간 치료사는 단지 성령이 그의 기능을 이행하도록 허용할 수만 있을 뿐이다. 성령은 그러기 위해 아무런 도움도 필요 없다. 성령은 그가 너에게 보내는 사람들을 도우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너를 통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지금 네가 다른 이를 도울 때 인도해 줄 안내자를 선택하고 있으며, 그릇된 선택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기억하라. 하지만 바른 선택은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또한 기억하라. 성령을 신뢰하라. 성령의 기능은 돕는 것이며, 성령은 하느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29 너 자신이 아닌 성령을 통해 다른 마음들을 일깨워 성령을 알아차리도록 할 때, 너는 네가 이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있지 않으며, 네가 따르는 법칙이 효과가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선한 것은 효과가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맞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오로지 선한 것만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밖에 다른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이 수업은 행동에 대한 안내다. 이 수업은 아주 직접적이고도 단순한 학습 상황이기에, 너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말해주는 안내자를 제공한다. 네가 그것을 행한다면, 이 수업이 효과가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수업의 말보다는, 이 수업의 결과가 더 설득력이 있다. 그 결과를 보고 너는 이 수업의 말이 참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바른 안내자를 따름으로써, 너는 모든 레슨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레슨을 배울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30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네가 그들을 알게 될 것이며,
그들도 그들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