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마법은 본질적으로 마음을 무분별하게, 즉 그릇되게 창조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로 된 약은 일종의 "주문"이다.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를 그릇된 창조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그가 유발할 수도 있는 모든 치유를 오해할 공산이 크며, 또한 자기중심성과 두려움은 대개 함께 일어나므로, 치유의 진짜 근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질적인 치유 도구에 일시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 자신의 창조물로 그릇되게 지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 취약하다고 느끼는 한, 기적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63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기적은 기적심의 표현이다. 기적심이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 단지 바른 마음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자는 기적일꾼과 기적을 받는 자의 마음을 추어올리지도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기적은, 기적을 받는 자가 바른 마음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실 기적의 목적은 그를 바른 마음 상태로 회복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 일꾼이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다른 사람 안에 바른 마음 상태를 재확립해 줄 수 없을 것이다.
64 자신의 준비 상태에 의존하는 치유사는 자신의 이해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준비되어 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나의 준비되어 있음에만 한결같은 신뢰를 유지하는 한, 그는 아주 안전하다. 만약 기적을 행하는 너의 성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너의 바른 마음 상태로 두려움이 침범해 들어와서 문자 그대로 그것을 뒤엎어 놓았기 때문이다. 즉, 위아래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식의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는 너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결과다. 기적일꾼이 속죄를 받아들이게 되면, 치유될 필요가 있는 자란 단지 바른 마음 상태가 곧 치유임을 깨닫지 못한 자임을 인식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65 기적일꾼의 유일한 책임은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마음이 유일하게 창조적인 수준이며, 마음의 잘못은 속죄로 치유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마음은 오로지 치유할 수만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파괴적인 잠재력을 부정하고 그것의 순전히 건설적인 힘을 회복시킴으로써, 다른 이들의 수준 혼동을 무효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일꾼이 다른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그들의 그릇된 창조물들은 그들을 해칠 수 없다는 진리다. 이렇게 확언함으로써, 기적일꾼은 마음을 마음 자신의 학습 도구(몸)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해방하여 학습자로서의 진정한 위치로 회복시킨다.
66 몸은 창조하지 않듯이 배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학습 도구로서 몸은 그저 학습자를 따를 뿐이지만, 자기 주도권을 잘못 부여받으면 자신이 촉진해야 할 바로 그 배움에 심각한 방해물이 된다. 오로지 마음만이 빛을 비출 수 있다. 영혼은 이미 밝게 비추어져 있으며, 몸은 그 자체로 너무 둔하다. 하지만 마음은 자신의 빛으로 몸을 비춰줄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이, 둔함은 지성의 반대라서 독립적으로 배우기가 쉽지 않음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몸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둔함 너머로 빛을 보는 법을 배운 마음은 쉽사리 몸을 자신에게 동조하게 만들 수 있다.
67 교정적인 배움은 항상, 영안을 깨우고 육안에 대한 믿음에 등을 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종종 두려움을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영안이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영안은 잘못을 볼 수 없으며, 잘못 너머로 속죄라는 방어기제만을 바라볼 수 있다. 영안이 보는 것이 극심한 불편함을 일으킨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불편함이 영안의 지각이 가져오는 최종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다. 제단의 오염을 바라보도록 허락받았을 때, 영안은 즉시 눈을 돌려 속죄도 바라본다.
68 영안이 지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움을 유발할 수 없다. 정확한 영적 자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다만 교정으로 보내질 뿐이다. 불편함은 단지 교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다. 육안이 보는 것은 교정하지 않으며, 육안이 볼 수 있는 어떤 도구로도 교정될 수 없다. 육체적 시각이 말해주는 것을 믿는 한, 사람의 모든 교정적인 행동은 잘못 인도될 것이다. 진정한 비전이 가려지는 까닭은, 사람이 자신의 더럽혀진 제단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은 이미 더럽혀졌기에, 그것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그의 상태는 곱절로 위험해진다.
69 치유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치유가 필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행한 것을 바라보는 것에 저항한다. 치유는 분리 이후에 사람에게 부여된 능력으로서, 그전에는 전혀 필요 없었다. 시공간 믿음의 모든 측면들처럼, 치유하는 능력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되는 한, 치유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치유가 자비에 기초하기 때문인데, 자비는 다른 사람의 완벽함을, 비록 그 스스로는 그것을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지각하는 방법이다.
70 사람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상한 개념은 시간에 의존한다. 자비는 실제로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아우름을 희미하게 반영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이제껏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의 자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지금 도달할 수 있는 제한된 의미의 바른 마음 상태에 있어서, 자비는 필수적이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그가 시간 안에서 실제로 성취한 것보다 이미 훨씬 더 멀리 나아간 듯이 보는 방법이다. 그 자신의 사고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속죄를 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그가 현재는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는 더 강해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71 이런 두 가지 지각이 언급된 방식은 그 지각들이 시간에 의존함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자비가 비록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한계 안에 있음을 아주 분명히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오로지 계시만이 시간을 초월한다. 인간의 진정한 자비의 표현으로서의 기적은 기껏해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네가 다른 이에게 기적을 베풀 때마다, 두 사람 모두의 고통을 단축하고 있음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순방향은 물론 소급적으로도 작용하는 교정 요인을 전체 기록에 들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