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하느님의 아들이 자신의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긴다면, 아무것도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은 잠에서 깨어나고, 영혼은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한다. 분리의 느낌이 전부 사라지고, 수준 혼동도 자취를 감춘다. 하느님의 아들은 성 삼위일체의 일부이지만, 삼위일체 자체는 하나다. 삼위의 수준들은 한 마음 한 뜻이기에, 그 안에는 혼동이 없다. 이와 같은 유일한 목적은 완벽한 통합을 창조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확립한다. 하지만 참으로 순결한 자들만이 이러한 비전을 지각할 수 있다.
20 순결한 자들은 마음 깊은 곳이 순수하기 때문에, 참된 지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는 대신에 참된 지각을 방어한다. 그들은 속죄의 레슨을 이해하기에 공격하려는 뜻이 없으며, 따라서 참되게 본다. 바로 이것이 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혹은 지각될 때) 우리도 그분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구절의 의미다.
21 희생은 하느님이 전혀 모르시는 개념이다. 그것은 단지 두려움에서 생겨난다. 이는 특히 불행한 일인데, 겁에 질린 자들은 사악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희생시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사람도 자비로워야 한다는 하느님의 계명을 명백히 거역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계명(혹은 과제)이 그들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깨닫기 어려워했다. 좋은 교사는 절대로 학생을 겁주지 않는다. 겁주는 것은 공격하는 것이며, 이것은 교사가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학습 실패다.
22 나를 "세상의 죄를 없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일컬은 것은 맞는 말이다. 어린 양을 피에 물든 것으로 묘사하는(이것은 너무도 널리 퍼진 잘못이다.) 자들은 이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단지 나의 순결에 대해 말해줄 뿐인 아주 단순한 비유다. 함께 누워있는 사자와 어린 양은, 힘과 순결이 갈등하지 않고 평화 속에 자연스레 산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축복받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도 똑같은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23 뇌의 통합 능력과 관련해서 "봄"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 간에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이 쟁점은 볼 수 (혹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몸인지 아니면 마음인지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실제로 전혀 질문거리가 아니다. 몸은 이해할 능력이 없으며, 오로지 마음만이 무엇이든 지각할 수 있다. 순수한 마음은 진리를 알며, 바로 이것이 그 마음의 힘이다. 그 마음은 몸을 공격할 수 없다. 그 마음은 몸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순수한 마음은 파괴를 순결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순결을 약함이 아닌 강함과 관련짓기 때문이다.
24 순결은 아무것도 희생시킬 수 없다. 순결한 마음은 모든 것을 가졌으며, 자신의 온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힘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순결한 마음이 그릇되게 투사할 수 없는 이유다. 그 마음은 사람을 존경할 수만 있을 뿐이다. 존경이란 참으로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닮은 자들에게 보내는 자연스러운 인사이기 때문이다. 순결한 상태, 즉 은혜는 속죄의 의미가 더없이 분명한 상태라는 의미에서만,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없애준다. 하느님의 순결은 그분 아들의 진정한 마음 상태다. 이 상태에서 사람의 마음은 정녕 하느님을 본다. 그리고 그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기에, 희생이 아닌 속죄가 자신의 제단에 어울리는 유일한 선물임을 안다. 그 제단에는 완벽함 외에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는다. 순결한 자들의 이해는 곧 진리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제단이 진정으로 빛을 발산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