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지각은 항상 뜻의 오용을 어느 정도 수반한다. 지각은 마음을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뜻하는 힘을 가졌으므로, 아주 활동적이다. 마음은 분리를 뜻했을 때 지각하기를 뜻했다. 그때까지 마음은 오로지 알기만을 뜻했다. 그 이후로 마음은 모호하게 뜻했으며, 이런 모호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명확한 지각이다. 마음은 알고자 뜻할 때만 자신의 고유한 기능으로 돌아간다. 이로 인해 마음은 영혼을 섬기는 자리에 있게 되며, 그곳에서 지각은 무의미하다. 초의식은 이러한 것을 뜻하는 마음의 수준이다.
45 마음이 자신의 수준들은 물론 지각하는 능력도 창조하기로 뜻했을 때, 마음은 자기 자신을 분열시키기로 선택했다. 하지만 마음은 자기 자신을 영혼과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었다. 마음은 창조하는 능력 전체를 영혼에서 얻어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릇되게 창조할 때조차 뜻은 마음의 근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마음은 그저 존재하기를 멈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은 영혼의 일부인데,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셨으므로 영원하기 때문이다.
46 지각하는 능력은 몸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너는 무언가를 가지고, 무언가를 지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각은 교환이나 해석을 수반한다. 하지만 앎은 그것들이 필요 없다. 지각의 해석 기능은 실제로 왜곡된 형식의 창조며, 그로 인해 사람은 몸을 자기 자신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울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 자신이 유발한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참으로 아는 초의식은 이러한 권능의 상실과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초의식은 어두워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초의식은, 마음은 거의 접근할 수 없고 몸은 완전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47 그 후로 초의식은 위협적인 존재라고 지각되었다. 빛은 단지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립함으로써 어둠을 폐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언제나 잘못을 이길 것이다. 이것은 전혀 적극적인 파괴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앎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앎은 공격자로 지각될 수 있지만, 공격할 수는 없다. 사람이 "앎의 공격"이라고 지각하는 것은 단지, 앎은 결코 파괴된 적이 없으므로 언제라도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
48 하느님과 그분이 창조하신 영혼들은 확실성 안에 머물며, 따라서 그릇된 창조물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진리는 저항하는 잘못은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잘못은 스스로 사라지기를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혼과 영혼의 앎을 기억한 사람이었으며, 사람으로서의 나는 잘못에 앎으로 대항하려고 하기보다는 밑에서부터 위로 교정하려고 했다. 나는 몸의 무력함과 마음의 힘을 모두 보여주었다. 나는 나의 뜻을 나의 창조주의 뜻과 연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영혼과 영혼의 진정한 목적을 기억했다.
49 나는 너를 대신해 너의 뜻을 하느님의 뜻과 연합해 줄 수 없지만, 너의 마음을 나의 안내에 맡긴다면, 너의 마음에서 일체의 그릇된 지각을 지워줄 수는 있다. 오로지 너의 그릇된 지각들만이 너의 길을 가로막는다. 그것들이 없다면, 너의 선택은 확실하다. 제정신인 지각은 제정신인 선택을 유발한다. 속죄는 진정한 지각에 근거한 행위였다. 나는 너를 대신해 선택할 수 없지만, 너 자신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많은 이들이 부르심을 받지만, 적은 이들만이 선택된다."라는 말은 "모든 이가 부르심을 받지만, 적은 이들만이 듣기로 선택한다. 따라서 그들은 바르게 선택하지 않는다."로 읽어야 한다.
50 "선택된 자들"이란 단지 먼저 바르게 선택한 자들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천상의 가속화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뜻이 굳건한 자들은 그것을 지금 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네 영혼을 위한 안식을 찾을 것이다. 하느님은 너를 오로지 평화 속에서만 아시며, 이것이 바로 너의 실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