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낌없이 주기라는 용어는 하느님의 교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며, 사실 아주 주의 깊게 배워야 하는 의미다. 하느님의 교사들의 다른 모든 특성들처럼, 아낌없이 주기 또한 궁극적으로 신뢰에 근거한다. 신뢰가 없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아낌없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게, 아낌없이 주기는 "포기하기"라는 의미에서 "주어버리기"를 의미한다. 하느님의 교사들에게, 그것은 간직하기 위해 "주어버리기"를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텍스트와 워크북을 통해 줄곧 강조했지만, 아마도 이 아이디어는 우리 커리큘럼의 다른 많은 아이디어들보다도 더 세상의 사고방식과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더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단지, 그 안에서 세상의 사고방식에 대한 역전이 아주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능한 가장 분명한 방식으로,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이 말은 하느님의 교사들과 세상에게 정확히 반대의 것을 의미한다.
19 하느님의 교사는 자기 이익 때문에 아낌없이 준다. 하지만 여기서 자기는 세상이 말하는 자기를 일컫지 않는다. 하느님의 교사는 그가 주어버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상 그에게 가치가 없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것을 원하겠는가? 그것으로 인해 그는 잃을 수만 있을 뿐이다. 그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만이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보증서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왜 굳이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보장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정녕 하느님에게서 온 것, 따라서 그분의 아들을 위한 것은 모두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기를 원한다. 그것들이야말로 본래 그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들이야말로 그가 다른 이들에게 진정으로 아낌없이 줌으로써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 인내
20 결과를 확신하는 자들은 기다릴 수 있으며,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린다. 인내는 하느님의 교사에게 자연스럽다. 그가 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확실한 결과뿐이다. 때로 그 결과는 그에게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는 그 응답만큼이나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혹은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당된다. 과거 또한 틀림없었다. 모든 것은 그것이 일어난 듯이 보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도 이롭게 했다. 어쩌면 당시에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교사는 자신이 과거에 내린 결정들이 누구에게든 고통을 야기한다면 그 모든 것을 다시 고려할 용의가 있다. 신뢰하는 자에게 인내는 자연스럽다. 그는 시간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을 확신하기에, 이미 본 것이든 앞으로 올 것이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할 수 없다.
• 신실함
21 신실함의 정도는 하느님의 교사가 커리큘럼에서 얼마나 진보했는지 가늠하는 척도다. 그는 여전히 삶의 다른 측면들은 따로 떼어둔 채 몇몇 측면들만 골라서 배움으로 가져가는가? 그렇다면 그의 진보는 제한되고, 그의 신뢰는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않은 것이다. 하느님의 교사에게 신실함이란, 하느님의 말씀이 단지 몇몇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실함은 단지 몇몇 문제들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시작되어, 당분간은 조심스럽게 제한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모든 문제를 유일한 응답에 맡기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이 신실함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그것만이 진정으로 신실함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각각의 단계는 성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 텍스트에서 언급하듯이, 준비되어 있음은 통달이 아니다.
22 그러나 진정한 신실함은 벗어남이 없다. 신실함은 일관되기에, 완전히 정직하다. 신실함은 흔들림이 없기에, 신뢰로 가득차 있다. 신실함은 두려움 없음에 근거하기에, 온유하다. 신실함은 확신하기에 기뻐하며, 굳게 믿기에 인내한다. 무방어가 자연스럽게 신실함을 뒤따르며, 기쁨은 신실함의 상태다. 그렇다면 신실함은 하느님의 교사들의 다른 속성들을 그 자체 안에 결합하는 것이다. 신실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리고 당신의 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실함은 항상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에게 기울여져야 한다. 신실함은 그들 쪽으로 눈을 돌려, 그들을 발견할 때까지 추구한다. 그리고 일단 발견하면, 신실함은 모든 신실함을 받아 마땅한 바로 그들만을 조용히 확신하며 안식한다.
• 열린 마음
23 하느님의 교사가 대체로 마지막에 습득하는 속성인 열린 마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그것과 용서의 관계를 인식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열린 마음은 판단 없음에 뒤따른다. 판단이 마음을 걸어 잠가 하느님의 교사를 내쫓듯이, 열린 마음은 그에게 들어오라고 초대한다. 정죄가 하느님의 아들을 악하다고 판단하듯이, 열린 마음은 그가 하느님을 대변하는 음성에 의해 판단받게 한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죄의식을 투사하는 것이 그를 지옥에 보내듯이, 열린 마음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투사되게 한다. 오로지 마음이 열린 자들만이 평화로울 수 있다. 오로지 그들만이 평화의 근거를 보기 때문이다.
24 마음이 열린 자들은 어떻게 용서하는가? 그들은 용서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내려놓았다. 그들은 세상을 정말로 포기했으며, 세상이 새롭고도 기쁜 모습으로 자신에게 회복되게 했다. 그 변화는 너무도 영광스러워서, 그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에는 너무도 둔하고 생기 없어 보이던 것 중에 이제 반짝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따뜻한 환영 인사를 보낸다. 왜냐하면,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남아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리는 구름도 전혀 없다. 이제 목표가 성취되었다. 용서는 커리큘럼의 최종 목표다. 용서는 모든 배움 저 너머로 가는 것을 위한 길을 닦는다. 커리큘럼은 자신의 정당한 목표를 넘어서려고 애쓰지 않는다. 용서는 모든 배움이 궁극적으로 수렴되는, 커리큘럼의 유일한 목표다. 정녕 용서로 충분하다.
25 너는 아마도 하느님의 교사들의 특성 목록에 하느님의 아들이 물려받은 유산은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사랑, 죄 없음, 완벽함, 앎, 그리고 영원한 진리와 같은 용어들은 이와 관련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여기서 너무나 부적절할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것은 우리의 커리큘럼을 훨씬 뛰어넘기에, 그것의 현존 안에서 배움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하지만 그것의 현존이 가려져 있는 동안에는, 초점은 당연히 커리큘럼에 맞춰져야 한다. 세상에 진정한 배움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의 교사들의 기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전하는 것은 배운 것의 무효화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의 "진정한 배움"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용서라는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임무가 하느님의 교사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들은 참으로 축복받았도다. 그들은 구원을 전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