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뜻이 분열되면 뜻의 일부에 대한 거부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바로 이것이 분리에 대한 믿음이다. 하느님의 온전성은 곧 그분의 평화이며, 온전한 마음 외에는 그것의 진가를 인정하여 감사할 수 없다. 그 마음은 하느님 창조물의 온전성을 인식하고, 이런 인식을 통해 자신의 창조주를 안다. 분리와 해리가 동의어듯이, 배제와 분리도 동의어다.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분리는 해리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일단 분리가 일어난 이상, 투사는 분리의 주요 방어수단, 즉 분리를 지속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백하지 않을 것이다.
26 우리는 지금 에고가 투사를 사용하는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에고의 투사에서, 너는 네가 투사하는 것과의 관계를 부정하며, 따라서 그것이 네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너는 네가 투사하는 사람과는 다르다는 바로 그 말을 통해 너 자신을 배제하고 있다. 그리고 너는 네가 투사하는 것에 반하여 판단했기에, 그것을 계속 공격한다. 너는 그것을 투사함으로써 이미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런 것을 무의식중에 함으로써, 분명 너 자신을 먼저 공격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식 바깥에 유지하려고 하며, 그럼으로써 너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한다.
27 투사는 항상 너를 해칠 것이다. 투사는 너 자신의 마음이 분열되었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투사의 유일한 목적은 분리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투사는 단지 에고의 도구로서, 네가 네 형제들과 다르며, 그들과 분리되었다고 느끼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에고는 투사가 너를 네 형제들보다 "더 나아" 보이게 만들어준다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로 이것을 정당화하며, 그럼으로써 너와 그들의 동등성을 한층 더 가린다. 투사와 공격은 불가피한 관계에 있다. 투사는 항상 공격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투사 없는 분노는 불가능하다.
28 에고가 투사를 사용하는 유일한 이유는, 너 자신과 네 형제들에 대한 너의 지각을 모두 왜곡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은, [네가 생각하기에] 네 안에 있지만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너를 네 형제들로부터 배제하는 것으로 곧장 이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투사에 다른 용도가 있음을 배웠다. 에고의 모든 능력에는 그에 상응하는 더 나은 능력이 있는데, 그것이 더 나은 이유는 더 나은 음성을 가진 마음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성령도 에고처럼 투사를 활용하지만, 그들의 목표가 상반되기 때문에, 그 결과도 상반된다.
29 성령은 너를 완벽하다고 지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성령은 이런 완벽함이 공유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다른 사람 안에서도 인식하며, 그 결과 그것을 두 사람 안에서 더욱 강화한다. 이것은 분노 대신에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이것은 포함함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동등성을 지각하는 성령은 동등한 필요를 지각한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속죄를 불러들인다. 속죄는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유일한 필요이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이런 식으로 지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네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정녕 불행하다.
30 기쁨이 없는 곳에서, 네가 거기에 없음을 깨닫는 것 외에 달리 어찌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너는 결코 하느님이 너를 두지 않으신 곳에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은 너를 당신의 일부로 창조하셨다. 이것이 바로 네가 있는 곳이자 너의 정체다. 그것은 전혀 바뀔 수 없다. 그것은 전적인 포함함이다. 너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그것을 바꿀 수 없다. 그것은 영원히 참이다. 그것은 어떤 믿음이 아닌, 사실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그분만큼이나 참이다. 그것의 진리는 오로지, 그것이 홀로 완벽하신 하느님 안에 완벽하게 포함되는 것에 놓여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부정하는 것은 너 자신은 물론 그분도 부정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하나만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