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정당화될 수 없는 것에는 어떤 정당한 근거도 있을 수 없다. 그것에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믿지도 말고, 그렇다고 가르치지도 말라. 너는 반드시 네가 믿는 것을 가르칠 것이다. 이를 항상 기억하라. 나와 함께 믿어라. 그러면 우리는 교사로서 동등해질 것이다. 너의 부활은 곧 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다. 나는 재탄생의 모델이지만, 재탄생 자체는 이미 너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몸소 그것을 너의 마음 안에 놓아두셨으며, 따라서 그것은 영원히 참이다. 나는 그것을 믿었으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나에게 영원히 참인 것으로 만들었다. 나를 도와서, 그것을 하느님 왕국의 이름으로 우리 형제들에게 함께 가르치자. 하지만 먼저 그것이 너에게 참임을 믿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잘못 가르칠 것이다.
11 내가 동산에서 이른바 "고뇌"하는 동안 나의 형제들은 자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분노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버려질 수 없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나를 결코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서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는 나를 칼로 지켜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몸을 보호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에 당연히 거절했다. 오로지 한 음성만 듣기로 한 나의 결정을 내 형제들이 공유하지 않을 때, 나의 마음은 정녕 안타깝다. 그것은 그들을 교사로서뿐만 아니라 학습자로서도 약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실제로 그들 자신은 물론 나도 배신할 수 없으며, 나의 교회를 여전히 그들 위에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12 이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로지 너희만이 하느님 교회의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제단이 있는 곳이며, 제단의 존재야말로 교회를 교회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랑을 고취하지 않는 어떤 교회든, 하느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섬기지 않는 제단을 감춰둔 것이다. 나는 그분의 교회를 너희 위에 세워야 한다. 나를 모델로 받아들이는 너희는 문자 그대로 나의 제자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란 따르는 자다. 그러나 그가 따르는 모델이 모든 면에서 그를 고통에서 구해주겠다고 선택했다면, 그를 따르지 않는 것은 그리 현명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13 나는 너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에고가 판단할 때 가장 잔인무도한 공격조차 문제가 되지 않음을 입증하기로 선택했다. 하느님이 아시는 대로가 아닌 세상이 판단하는 대로 이런 일을 본다면, 나는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으며, 매 맞고 찢기다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단지 다른 이들의 투사 때문이었음은 너무도 분명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를 치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학습자로서 동등하다. 우리는 비록 같은 경험을 할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 네가 나의 경험으로부터 충분히 배워서 그로 인해 다시 깨어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성령은 크게 기뻐한다. 그것은 내 경험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며, 너는 오로지 그 방법을 통해서만 나를 길이요 진리요 빛이라고 지각할 수 있다.
14 네가 오로지 한 음성만 들을 때, 그것은 결코 희생을 요구받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이들 안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됨으로써 너는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으며,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그러한 이유는 성령이 하나이며, 경청하는 자는 누구나 모든 이를 위한 성령의 길을 입증하도록 이끌리기 때문이다. 너는 박해받고 있지 않으며, 나도 박해받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나의 경험을 되풀이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유하는 성령이 그것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나의 경험을 건설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각하는 방법에 있어서 나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15 나의 형제들과 너의 형제들은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끊임없이 몰두하고 있다. 성령의 판단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지각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배운 대로 가르쳐야 하는 유일한 레슨이다. 나는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도 이것이 참임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분노와 공격에 항복하려는 유혹이 그렇게 극단적이지 않은 자들에게 그것이 좋은 가르침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 누구도 고통받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하느님과 함께 이와 같이 뜻한다.
16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분리된 아들들 사이의 소통 고리임을 기억하라. 네가 만약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네가 상처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또한 많은 이가 스스로 이 음성을 듣기 위해 너의 축복을 필요로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 안에서 오로지 이 필요만 지각하고 다른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게 될 때, 너는 마침내 나에게 배운 것이다. 그리고 너는 네가 배운 것을 나처럼 간절히 공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십자가형은 공유될 수 없다. 그것은 투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은 공유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모든 아들이 다시 깨어나는 것은 온아들이 자신의 온전성을 알게 하는 데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앎이다.
17 십자가형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하고 지극히 분명하다:
18 오로지 사랑만 가르쳐라. 그것이 너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19 네가 만약 십자가형을 이와 다른 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공격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평화를 향한 요청으로 의도되었건만…. 사도들도 십자가형을 자주 오해했는데, 그것은 항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사랑이 불완전하여 투사에 취약해졌으며, 두려운 나머지 하느님의 보복 무기로서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고서는 십자가형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죄의식이 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20 신약의 전체 복음은 오로지 사랑의 메시지일 뿐이지만, 그 안에는 위아래가 뒤집힌 사고를 뚜렷이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이것은 내가 수차례 인내심을 보이지 못한 경우와는 다르다. 나는 속죄 기도를 가르치러 왔으며, 또한 그것을 충분히 깊이 배웠기 때문에, 위아래가 뒤집힌 사고에 휘말릴 수 없었다. 사도들이 만약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면, 내가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내가 가르친 모든 것과 정반대다.
21 또한 사도들이 나를 정말로 이해했다면, 유다에 대한 나의 반응을 그들이 묘사한 것처럼 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배반을 믿는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 한, 그들은 내가 유다에게 "너는 사람의 아들을 입맞춤으로 배반하느냐?"라고 말할 수는 없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십자가형의 전체 메시지는 단순히 말해, 나는 배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유다에게 내렸다고 전해지는 "처벌" 또한 비슷하게 뒤바뀐 경우였다. 유다는 나의 형제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나와 마찬가지로 온아들의 일부였다. 정죄는 불가능함을 기꺼이 보여주려던 내가 유다를 정죄하려 했다는 것이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22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해 아주 감사하고, 그들이 나에게 얼마나 헌신했는지 충분히 알아차리고 있다. 그렇긴 해도 네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을 때는, 당시 그들은 나를 따를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아서 훗날에야 이해할 것이 많다고 내가 직접 말해주었음을 기억하라.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지금 너를 안내해 데려가고 있는 사고체계 안으로 어떤 두려움이라도 침투해 들어오도록 네가 허락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순교자들이 아닌 교사들이 필요하다. 그 누구도 죄 때문에 "처벌받지"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들은 죄인이 아니다.
23 모든 "처벌" 개념은 비난의 투사를 수반하며, 비난이 정당하다는 아이디어를 강화한다. 그로 인한 행위는 비난을 가르치는 레슨이다. 이것은 모든 행위가 그 행위를 유발하는 믿음을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십자가형은 명백하게 상반되는 사고체계들로 인해 발생한 여러 행위들의 복합체였다. 그렇게 십자가형은 에고와 하느님의 아들 사이의 갈등을 완벽하게 상징한다. 십자가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인들 간에는 물론 개인 안에서도 일어난 일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실재적이다. 그러나 십자가형이 지금도 꼭 그렇게 실재적이기 때문에, 그것의 레슨들 또한 잘 배운다면 똑같은 실재성이 있다. 나에게는 보호가 필요 없었듯이 감사도 필요 없지만, 너는 감사하는 능력이 약해졌기에 그것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없다. 그분은 너의 감사가 필요 없으시지만, 너는 너의 감사가 필요하다.
24 너는 네가 감사하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으며, 두려움은 감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너 자신의 정체를 두려워할 때마다 너는 그것에 감사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너는 거부를 가르칠 것이다. 하느님 아들들의 권능은 항상 작동하고 있다. 그들은 창조자들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한계가 없으며, 반드시 그들 공동의 구원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들은 저마다 모든 형식의 거부가 완전히 무의미함을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분리란 실로 거부라는 개념이다. 네가 이렇게 거부를 가르치는 한, 너는 여전히 분리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생각하시는 대로가 아니다. 그리고 네가 만약 하느님을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분이 생각하시는 대로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