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와 공격의 관계는 명백하지만, 분노와 두려움의 불가피한 관련성은 항상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다. 분노는 항상 분리의 투사를 수반하며, 너는 궁극적으로 이것을 너의 전적인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공격받았으며, 그 공격은 정당하지 않았고, 너는 그 공격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다고 믿지 않는 한, 분노는 일어날 수 없다. 이렇게 완전히 비이성적인 세 가지 전제하에서는, 어떤 형제가 사랑이 아닌 공격을 받아 마땅하다는, 똑같이 비이성적인 결론이 뒤따른다. 제정신이 아닌 전제로부터 제정신이 아닌 결론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미친 결론을 무효화하는 방법은 그것이 근거하는 전제가 제정신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너는 정녕 공격받을 수 없으며, 공격에는 정당한 근거가 없다. 그리고 너는 네가 믿는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전에 너에게 나를 학습 모델로 삼으라고 청한 적이 있는데, 극단적인 본보기는 특히 도움이 되는 학습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르치며, 언제나 가르친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전제든 받아들이는 순간 불가피하게 떠맡는 책임이다. 그리고 아무런 사고체계 없이도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일단 어떤 사고체계든 만들어내고 나면, 그것에 따라 살며 그것을 가르친다.
3 너희가 속죄를 가르치도록 선택된 이유를 정확히 말하자면, 너희가 그동안 자신의 사고체계에 충성하는 극단적인 본보기였으며, 따라서 충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일종의 신앙으로서, 너희는 그것을 정녕 잘못된 곳에 사용했지만 다른 방향으로 돌릴 용의를 냈다. 너희가 그동안 얼마나 충실하게 그 신앙을 지켜왔는지 잘 생각해 본다면, 너희의 헌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너희가 더 나은 모델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를 따를 능력은 이미 개발해 두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4 학습 목적을 위해 십자가형에 대해 다시 잘 살펴보자. 이에 대해 전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운 연상 때문이었다. 우리가 십자가형에 대해 유일하게 강조한 것은, 그것이 어떤 처벌이 아니었다는 점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부정적인 방식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십자가형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하나 있는데, 그것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 따라서 제대로만 이해한다면, 그 가르침의 내용은 전적으로 자비롭다. 십자가형은 극단적인 본보기에 불과하다. 모든 가르침의 도구가 그렇듯이, 십자가형의 가치는 전적으로 그것이 어떤 배움을 촉진하는지에 달려있다. 십자가형은 오해받을 수 있으며, 그동안 오해를 받아왔다. 그 이유는 단지, 두려워하는 자들은 두렵게 지각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5 나는 이미 너에게, 너는 언제든지 나를 불러 나의 결정을 공유함으로써 그것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또한 십자가형은 온아들에게 필요한 마지막 어리석은 여정이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자에게는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고도 말해주었다. 우리는 전에 단지 부활만 강조한 반면, 십자가형의 목적과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부활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십자가형은 너희 자신의 삶에 확실하게 기여할 점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움 없이 숙고해 본다면, 너희가 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6 여러 해 동안, 너는 마치 네가 십자가형에 처해지기라도 하는 듯이 반응해 왔다. 이것은 분리된 자들이 뚜렷이 보이는 경향인데, 그들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지 숙고해 보기를 거부한다. 투사는 분노를 의미하고, 분노는 공격을 조장하며, 공격은 두려움을 촉진한다. 십자가형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몇몇 아들들이 다른 아들에게 가한 공격이 겉보기에 강렬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물론 불가능하며, 불가능한 것으로 충분히 이해해 두어야 한다. 십자가형을 오로지 그런 것으로만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한, 나는 배움을 위한 진정한 모델로서의 역할을 이행할 수 없다.
7 공격은 궁극적으로 오로지 몸에만 가해질 수 있다. 한 몸은 다른 몸을 공격할 수 있으며, 심지어 파괴할 수도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파괴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파괴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실제일 수 없다. 따라서 몸의 파괴는 분노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너는 그것이 분노를 정당화한다고 믿는 정도만큼 거짓된 전제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형이 가르치고자 했던 메시지는 바로, 박해에서 어떤 형식의 공격도 지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정녕 박해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분노로 반응한다면, 너 자신을 파괴될 수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너 자신을 제정신이 아닌 방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8 나는 너와 같고 너는 나와 같다는 점을 내가 아주 명확히 해두기는 했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동등성은 오로지 공동의 결정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너는 선택하기에 따라 자신이 박해받는다고 지각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네가 그런 식으로 반응하겠다고 선택할 때, 나는 세상이 판단하는 대로 박해를 받았지만, 스스로 그런 평가를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좋다. 그리고 나는 그런 평가를 공유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강화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공격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한 것이며, 그것을 너와 절실히 공유하기를 원한다. 네가 그런 해석을 믿는다면, 너는 내가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돕게 될 것이다.
9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너는 네가 가르치는 대로 배울 것이다." 네가 만약 박해라도 받는 듯이 반응한다면, 너는 박해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구원을 깨닫고자 한다면, 이런 레슨을 가르치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네 안의 진리인 너 자신의 완벽한 면역성을 가르치고, 그것은 공격받을 수 없음을 알라. 그것을 스스로 보호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그것이 공격받을 수 있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나는 너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기여한 가르침의 일부였다. 나는 단지 너에게, 그릇되게 지각하려는 훨씬 덜 극단적인 유혹 앞에서 나의 본보기를 따르고, 그것을 분노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잘못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청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