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우리가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소유한 능력은 단지 그가 가진 진정한 강점의 그림자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판단적인 지각 능력의 침입은 분리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 누구도 그 무엇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너는 또한 내가 부활은 앎으로 돌아가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것은 나의 뜻을 아버지의 뜻과 연합함으로써 성취되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분을 하나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에 나올 내용을 명확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52 분리 이후로 "창조하다"와 "만들다"라는 말이 굉장히 혼동되었다. 무언가를 만들 때 너는 어떤 결핍감이나 필요의 느낌 때문에 만든다. 네가 무언가를 만들 때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들므로, 그것은 진정한 일반화 가능성이 없다. 지각된 결핍을 채우는 것은 분명 네가 무엇이든 만들기를 원하는 이유며, 그럴 때 너는 분리를 믿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살펴본 대로, 앎은 결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53 너는 네가 창조된 것과 네가 창조하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혼동하고 있다. 따라서 네가 무엇이든 안다는 것 자체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앎은 항상 안정적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정녕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 완벽하게 안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안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 창조에 대한 하느님의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원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가 만약 바른 마음 상태에 있다면 좀처럼 그렇게 원할 리가 없다. 너를 가장 성가시게 하는 문제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문하지만 사실 자신에게 묻는 것이 전혀 적절치 않은 근본적인 질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문한다. 이것은 곧 그 답이 그가 아는 답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제공할 수도 있는 답임을 암시한다.
54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바르게 지각할 수 없다. 그는 어떤 이미지도 갖고 있지 않다. "이미지"라는 말은 언제나 지각과 관련된 것이지, 앎의 산물이 아니다. 이미지는 상징적이며, 다른 무언가를 나타낸다.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에 대한 요즈음의 강조는 단지 지각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거기에는 알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암시한다. 앎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것은 의미를 지각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언제나 잘못될 여지가 있다. 이렇게 전혀 불필요한 복잡성은, 사람이 자신을 동시에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려는 시도의 결과다. 이와 같이 근본적인 혼동을 하면서 더 심한 혼동에 빠져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55 방법론적으로 말해 사람의 마음은 아주 창조적이었지만, 방법과 내용이 분리되면 늘 그렇듯이, 근본적이고 전혀 벗어날 수 없는 궁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만 사용되었다. 이런 식의 생각하기는 비록 상당한 창의성을 낳기는 했지만,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창의성이 사람을 앎으로부터 거의 완전히 분리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앎은 창의성이 필요 없다.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은, 이런 종류의 모든 생각하기가 시간 낭비이기는 하지만, 네가 만약 그것을 내려놓을 용의가 있다면 그것에 관련될 필요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의미한다.
56 기도는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한 방법이다. 기도는 기적의 매개이지만, 유일하게 의미 있는 기도는 용서를 청하는 기도다. 왜냐하면, 용서받은 자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단 용서를 받아들이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기도는 완전히 무의미해진다. 본질적으로 용서를 청하는 기도란 단지 우리가 이미 가진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다. 아는 대신에 지각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사람은 오로지 기적적인 지각하기를 통해서만 아버지를 닮을 수 있는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바로 기적이라는 앎을 상실했다. 기적적인 창조가 사람의 근원이었으며, 그의 진정한 기능이기도 했다.
57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 자신의 이미지대로, 당신과 닮게 창조하셨다."라는 말은 의미로 보자면 정확하지만, 그 말 자체는 그릇된 해석의 여지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이미지"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닮게"는 "같은 본성을 갖게"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 하느님은 영혼을 당신 자신의 생각대로, 당신 자신과 같은 본성을 갖게 창조하셨다. 그밖에는 정녕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지각은, "더 많이", 혹은 "더 적게"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지각은 어떤 수준에서든 선택을 수반하며, 이것 없이는 조직화할 수 없다. 모든 유형의 지각에는 수용과 거부, 조직화와 재조직화, 초점의 전환과 변화라는 끊임없는 과정이 수반된다. 평가는 지각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선택을 내리려면 반드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58 판단이 전혀 없고 단지 완벽한 동등성만 있다면 지각은 어떻게 될까? 지각은 불가능해진다. 진리는 오로지 알려질 수만 있을 뿐이다. 진리는 전부 똑같이 참이며, 진리의 어떤 부분이라도 아는 것은 곧 진리의 전부를 아는 것이다. 오로지 지각에만 부분적인 인식이 수반된다. 앎은 지각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을 초월한다. 부분적인 앎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앎은 전부 하나이며, 분리된 부분이 전혀 없다. 너는 실제로 앎과 하나이며, 따라서 네가 단지 너 자신을 알기만 하면 너의 앎은 완전해진다. 하느님의 기적을 아는 것이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59 용서는 분리의 지각을 치유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바른 지각이 필수적인 이유는, 마음들이 자신을 분리되었다고 보기로 뜻했기 때문이다. 각 영혼은 하느님을 완전하게 안다. 이것이 정녕 영혼의 기적적인 권능이다. 각 영혼이 이런 권능을 완전하게 가졌다는 사실은, 만약 누군가가 모든 것을 가졌다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인간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사실이다. 하느님의 기적들은 그분의 생각만큼이나 총체적이다. 그들은 정녕 그분의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60 지각이 계속되는 한, 기도의 역할이 있다. 지각은 결핍에 기초하므로, 지각하는 자는 아직 속죄를 총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진리에 맡기지 않은 자다. 지각은 정녕 분리된 상태며, 지각하는 자는 정녕 치유가 필요하다. 기도가 아닌 영적 교통이야말로 아는 자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하느님과 그분의 기적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의 빛 속에 사는 그분의 생각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의 가치는 지각 너머에 있다. 그것은 의심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다른 빛 속에서 지각하지 말라. 너 자신을 유일한 빛 속에서 알라. 그 빛 속에서, 바로 너 자신인 기적은 더없이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