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하느님의 뜻은 너의 구원이다. 그러니 그분이 너에게 구원을 찾을 수단을 주시지 않았겠는가? 그분이 네가 구원을 갖기를 뜻하신다면, 구원을 가능하고도 아주 얻기 쉽게 만드셨을 것이다. 네 형제들은 어디에나 있다. 구원을 찾으러 멀리 다닐 필요가 없다. 매분 매초가 너에게 너 자신을 구할 기회를 준다. 이런 기회들을 잃지 말라. 그런 기회가 돌아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쁨을 미룰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너에게 완벽한 행복을 지금 뜻하신다. 이것이 또한 너의 뜻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것이 또한 네 형제들의 뜻이 아닐 수 있겠는가?
39 그렇다면 이러한 공동의 뜻 안에서, 그리고 오로지 그 뜻 안에서만, 하느님과 네가, 그리고 너의 형제들이 모두 연합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숙고해 보라. 다른 것에서는 의견 차이가 있겠지만, 이 점에 있어서만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뜻이야말로 평화가 머물러 사는 곳이다. 그리고 네가 그렇게 결정할 때, 너는 평화 속에 머물러 산다. 하지만 너는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평화 속에 머물러 살 수 없다. 속죄는 정녕 평화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명백해서 너는 그것을 종종 못 보고 넘어간다. 명백함은 실재의 본질적인 특징이므로, 에고는 명백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안 보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못 보고 넘어갈 수는 없다.
40 성령이 만약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바라본다면, 너도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에 대한 성령의 평가는 너의 정체에 대한 성령의 앎에 근거하며, 따라서 성령은 너를 참되게 평가한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분명 너의 마음 안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이 너의 마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에고 또한 너의 마음 안에 있다. 왜냐하면 네가 에고를 그곳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에 대한 에고의 평가는 성령의 평가와 정반대다. 에고는 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는 너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완전히 불신한다. 에고 자신의 지각이 너무도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최선의 경우라고 해봤자 의심할 수 있을 뿐이며, 최악의 경우 사악하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범위다. 에고는 자신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이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에고는 결코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 에고는 결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1 그렇다면 너의 마음에는 너 자신에 대한 두 개의 상반되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너는 아직 이 평가들이 얼마나 철저히 다른지 깨닫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너에 대한 성령의 지각이 정말로 얼마나 지고한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너의 정체를 결코 잊지 않으며, 따라서 너의 어떤 행위에도 속지 않는다. 에고는 네가 행하는 모든 것에 속고, 심지어 네가 성령에게 반응할 때조차 속아 넘어간다. 그럴 때 에고의 혼동은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고는 네가 사랑으로 반응할 때 특히 너를 공격하기 쉽다. 에고는 너를 사랑이 없는 자로 평가했는데, 너는 에고의 판단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42 너의 동기가 너에 대한 에고의 지각과 확실하게 어긋나는 순간, 에고는 그것을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럴 때 에고는 불확실성이 증가하여 의심하던 상태에서 사악한 상태로 급격히 옮겨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으로 공격하는 것은 분명 무의미하다. 이것은 단지 너의 정체에 대한 에고의 평가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너 자신을 사랑 없는 자로 보고 싶어 한다면, 너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을 부족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너는 에고가 발생시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유지해야 하는 이런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게 도와달라고 에고에게 기대려는가? 에고가 이런 그림을 고스란히 간직하려고 사용하는 방법을 가지고 너에 대한 에고의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43 제정신이 아닌 믿음 체계를 그 안에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믿음 체계의 범위 자체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너는 그 믿음 체계 너머로 가서, 제정신이 존재하는 지점에서 돌아보아야 비로소 그 대비를 볼 수 있다. 오로지 이런 대비를 통해서만 정신 이상을 정신 이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너는 내면에 하느님의 장엄함을 지니고도 왜소해지기로 선택해서, 자신의 왜소함을 한탄하기로 선택했다. 이러한 선택을 지시한 체계 안에서는 정녕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는 너의 왜소함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너는 "누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이 질문은 에고 사고체계 안에서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그 사고체계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4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에고는 진정한 질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종류의 앎이 결여되든, 그것은 항상 알지 않으려는 뜻과 관련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앎의 총체적인 결여 상태를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단지, 앎은 총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왜소함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은 곧 모든 앎을 부정하고 에고의 사고체계 전체를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이다. 너는 어떤 사고체계의 일부만 간직할 수는 없다.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로지 그 토대에 대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그 사고체계 너머로부터 제기되어야 한다. 그 사고체계 안에는 그것의 토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에고 사고체계의 실재성에 반하여 판단을 내리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것의 토대가 참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토대에서 발생하는 것은 무엇이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은 너의 모든 믿음을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보고 판단한다. 그 믿음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성령은 그것이 참임을 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무의미함을 안다.
45 너의 가치에 대해 의심이 들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하라:
46 내가 없다면, 하느님도 불완전하시다.
47 에고가 말할 때, 이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너는 에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너에 대한 진리는 너무도 지고해서,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은 것은 너에게도 합당하지 않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것을 이런 관점에서 선택하고, 하느님께 아주 잘 어울린다고 여겨 드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말라. 왜냐하면 너는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서 네가 차지하는 부분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그분은 네가 당신께 속한 것을 돌려드려서 당신을 완성한 것에 대한 답례로, 당신의 전부를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