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속죄는 오로지 네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너는 이제껏 속죄를 주로 바깥에 있는 것으로 지각했는데, 그로 인해 속죄에 대한 경험이 극히 적었다. 방어기제를 재해석하는 것은 내면의 빛을 방출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분리 이후로, 사람의 방어기제는 거의 대부분 속죄에 맞서 그 자신을 방어함으로써 분리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들 자신은 대체로 이것을 몸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라고 여긴다. 사람의 마음이 열중하고 있는 수많은 몸 판타지들은 몸이 "속죄"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왜곡된 믿음에서 발생한다.
45 몸을 사원으로 지각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왜곡을 교정하는 데 있어서 첫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릇된 지각의 일부는 바꾸지만, 전부를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몸과 관련된 속죄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러나 다음 단계는, 사원이란 전혀 어떤 건물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사원의 진정한 거룩함은 그 건물에 둘러싸인 내면의 제단에 있다. 아름다운 교회 건물에 대한 부적절한 강조는, 사람들이 속죄를 두려워하고 제단 자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표시다. 사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반면에 영안은 완벽한 시각을 가졌으므로 건물을 전혀 볼 수 없다. 하지만 제단은 아주 뚜렷하게 볼 수 있다.
46 속죄는 완벽한 효율성을 위해 내면의 제단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곳에서 분리를 무효화하고 마음의 온전성을 회복해 준다. 분리 이전에, 마음은 두려움 때문에 상처받을 수 없었다.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리와 두려움은 모두 마음의 그릇된 창조물로서, 무효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원의 재건"이란 말이 의미하는 바다. 이것은 건물의 재건이 아니라, 속죄를 맞이하기 위해 제단을 연다는 의미다. 이것은 분리를 치유하고, 마음의 모든 분리 오류에 반하는 유일한 방어기제를 사람의 내면에 놓아주며, 그 결과 사람을 완벽하게 상처받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줄 수 있다.
47 모든 이가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실 시간과 물질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 이것은 최종 결정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므로, 자유 의지와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를 면밀하게 검토해 본다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그것이 창조된 방법에 의해 어떻게든 제한된다. 자유 의지는 우물쭈물하거나 엄청나게 지체할 수 있지만, 자신의 창조주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다. 그분은 자유 의지가 그릇되게 창조하는 능력에 제한을 가하셨는데, 그것은 자유 의지의 진정한 목적에 의거한 것이었다.
48 의지의 오용은, 극단적인 경우 전혀 견딜 수 없는 상황을 일으킨다. 고통의 역치가 높을 수는 있지만, 한계가 없지는 않다. 결국에는 모든 이가 아주 희미하게라도 더 나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런 인식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음에 따라, 그것은 지각의 전환점이 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영안을 다시 깨우며, 동시에 육안에 대한 투자를 약화한다. 이렇게 두 종류, 즉 두 수준의 지각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투자는 대개 오랫동안 갈등으로 느껴지고 아주 심각해질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하느님만큼이나 확실하다.
49 영안은 문자 그대로 잘못을 볼 수 없으며, 그저 속죄만을 구한다. 육안이 추구하는 모든 해결책은 영안이 보는 앞에서 녹아 사라진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안은 제단이 더럽혀져서 수리와 보호가 필요함을 즉시 알아차린다. 영안은 바른 방어기제를 완벽하게 알아차리고 있기에, 다른 모든 방어기제를 지나쳐서 잘못 너머로 진리를 본다. 영안은 그 비전의 힘이 아주 강력하므로, 의지를 끌어당겨 자신을 섬기게 하고, 마음이 이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것은 의지의 참된 권능을 재확립하며, 이제 마음은 점점 더 지연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마음은, 지연이란 단지 불필요한 고통을 증가시키는 방법일 뿐이며, 고통을 참을 필요가 전혀 없음을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는다. 이에 따라 고통의 역치가 내려가면서, 한때 아주 사소한 불편으로 여겼던 것에 점점 더 예민해지게 된다.
50 하느님의 아이들은 완벽한 신뢰의 느낌에서 비롯되는 완벽한 편안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것을 얻을 때까지, 그들은 부적절한 수단으로 자신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려는 헛된 시도를 하면서 그들 자신과 그들의 진정한 창조적 권능을 소모한다. 그러나 참된 수단은 이미 제공되었으며, 그들로서는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자기중심성은 대체로 이것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잘못 지각하는데, 이것은 분명 그들 자신에 대한 그릇된 지각에서 일어나는 해석이다. 자기중심성과 영적 교통은 공존할 수 없다. 용어들조차도 서로 모순된다.
51 속죄는 하느님의 제단에 올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그 이유는, 그 제단 자체의 측량할 수 없는 가치 때문이다. 그 제단은 완벽하게 창조되었으며, 완벽함을 받을 전적인 가치가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혼들 없이는 정녕 외로우시며, 영혼들도 하느님 없이는 외롭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분리를 치유하는 수단으로 지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속죄는 그들이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보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