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너의 작은 역할은 단지 희생이라는 아이디어 전체를 성령께 드리고, 그 대신에 성령이 준 평화를, 평화의 확장을 저지하여 평화에 대한 너의 자각을 제한하려는 한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성령이 주는 것의 무한한 권능을 갖고서 그것을 하느님 아들의 해방을 위해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평화가 아니며, 너는 그러한 평화를 가졌기에 그것을 제한할 수 없다. 만약 평화가 집 없는 신세라면, 너도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의 집이신 하느님도 우리와 더불어 집 없는 신세가 되신다. 이것이 과연 너의 뜻인가? 너는 평화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방랑자가 되고자 하는가? 평화와 행복에 대한 희망을, 너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에 걸고자 하는가?
69 영원한 것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정당한 근거가 있다. 영원한 것은 영원히 친절하고, 무한히 인내하며,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를 온전히 받아들여서 평화를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네 안에서 이미 평화로운 것, 자기 자신처럼 불멸인 것과만 연합할 수 있다. 몸은 너에게 평화도 혼란도, 고통도 기쁨도 가져다줄 수 없다. 몸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오로지 주어진 목적만 있다. 몸은 네가 몸에 부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일 것이다. [오로지 마음만이 목적을 세울 수 있으며, 오로지 마음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보고 그것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 평화와 죄의식은 모두 마음이 이루어내는 상태들이다. 그리고 각 상태는 그 상태를 불러일으킨, 따라서 그 상태와 어울리는 감정의 집이다. 다만 어떤 상태가 너와 잘 어울리는지 생각해 보라.
70 여기에 너의 선택이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녕 자유롭다. 하지만 그 선택 안에 놓여있는 모든 것도 같이 올 것이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너의 정체는 결코 그 선택과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몸은 믿음의 대단한 배신자로 보인다. 몸 안에는 환멸과 믿음 없음의 씨앗이 놓여있지만, 오로지 네가 몸에게 몸이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할 경우에만 그러하다. 너의 실수가 과연 우울과 환멸, 그리고 너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보복 공격의 합리적인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너의 잘못을 너의 믿음 없음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말라. 너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엇이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해 잘못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너의 실수를 교정하는 것은 너에게 믿음을 위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71 몸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면서 고통을 발견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에고가 죄의 증거라고 보는 관계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전혀 처벌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너 자신을 몸과 동일시한 것의 불가피한 결과다. 몸과의 동일시는 고통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그것은 두려움에게 들어와서 너의 목적이 되라고 초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매력이 반드시 두려움과 함께 들어올 것이며, 따라서 두려움이 몸에게 행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몸은 모든 환상의 고통을 공유할 것이며, 쾌락의 환상은 고통과 같을 것이다.
72 이것은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두려움의 명령 아래, 몸은 죄의식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주인을 섬길 것이다. 그 주인이 죄의식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몸이 존재한다는 환상 전체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고통의 매력이다. 이런 지각의 지배를 받아, 몸은 고통의 하인이 되어 충실하게 고통을 구하고 고통이 쾌락이라는 아이디어에 복종한다. 몸에 대한 에고의 엄청난 투자 아래에는 바로 이런 아이디어가 깔려있다. 에고는 이런 정신 이상 관계를 감추고 있지만, 사실 그러한 관계를 먹고 산다. 에고는 너에게 몸의 쾌락이 행복이라고 가르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건 죽음이야."라고 속삭인다.
73 도대체 왜 몸이 너에게 무엇이든 되어야 한단 말인가? 확실히 몸을 구성하는 것들은 값지지 않다. 마찬가지로 확실히 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 몸은 네가 원하는 감정을 너에게 전달한다. 다른 모든 소통 매체처럼, 몸은 주어진 메시지를 받아서 내보낸다. 몸은 그 메시지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 그 메시지에 부여된 모든 감정은 보내는 자와 받는 자가 주는 것이다. 에고와 성령은 둘 다 이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여기서 메시지를 보내는 자와 받는 자가 같다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성령은 이것을 너에게 기쁘게 알려준다. 에고는 네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원하기에, 그것을 숨긴다. 증오와 공격의 메시지를 단지 자기 자신에게 보낼 뿐임을 이해한다면, 그 누가 그런 메시지를 보내려 하겠는가? 그 누가 자기 자신을 고발하여 유죄로 만들고 정죄하려 하겠는가?
74 에고의 메시지는 항상, 너의 공격과 죄의 메시지로 인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너로부터 바깥으로 보내진다. 설령 네가 고통받는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더 고통받을 것이다. 대단한 사기꾼은 이것이 그렇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지만, 평화의 "적"인 그는 너의 모든 증오의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너 자신을 해방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다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에고는 몸에게 다른 몸을 공격하는 데서 고통을 찾을 것을 명하며, 고통을 쾌락이라고 부르면서 너에게 그것을 공격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제공한다.
75 에고의 광기에 귀 기울이지 말고, 불가능한 것이 참이라고 믿지도 말라. 에고는 몸을 죄라는 목표에 바쳤으며, 몸이 그것을 이뤄줄 수 있다고 철저히 믿고 있음을 잊지 말라. 에고의 슬픈 제자들은 에고의 지배를 엄숙히 축하하면서 몸의 찬가를 끝없이 불러댄다. 그들 가운데 죄의식의 매력에 굴복하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지 않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들 가운데 몸이 자기 자신이며, 몸이 없으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 자도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몸 안에서도 그들의 죽음은 마찬가지로 불가피하다.
76 에고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죽음에 바쳤음을 깨닫지 못한다. 자유가 그들에게 제공되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공된 것은 받아들여져야만 진정으로 주어질 수 있다. 성령 또한 일종의 소통 매체로서, 아버지께 메시지를 받아 아들에게 제공한다. 에고처럼 성령도 메시지를 보내는 자일 뿐만 아니라 받는 자기도 하다. 성령을 통해 보내진 것은 성령께 돌아오면서 그 과정에 자기 자신을 구하고, 또한 자신이 구하는 것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에고도 자신이 구하는 죽음을 찾아내서, 그것을 너에게 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