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죄의식에 대한 에고의 용도를 명확히 한다면, 몇 가지 개념이 더욱 뚜렷해지고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될 것이다. 성령과 마찬가지로, 에고도 어떤 목적이 있다. 에고의 목적은 두려움이다. 오로지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이기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논리는 성령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가 없다. 너의 마음은 선택하기에 따라 천국이나 땅과 한편이 되기 위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그 모든 수단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천국과 땅은 둘 다 네 안에 있음을 기억하자. 천국에는 죄의식이 없다. 천국은 속죄를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속죄는 너를 해방하여 창조할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창조하다"라는 단어가 적절한 이유는, 네가 만든 것이 일단 성령에 의해 무효화되면, 나머지 축복받은 것들이 복원되어 창조를 계속 이어가기 때문이다.
60 참으로 축복받은 것은 죄의식을 일으킬 수 없으며, 기쁨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그것은 에고에 끄떡없게 된다. 그것의 평화는 공격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전하기 때문에, 분열에도 끄떡없다. 죄의식은 항상 분열시킨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든 분열을 일으킨다. 그것은 분열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에고가 분리의 상징이라면, 또한 죄의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죄의식은 단지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공격의 상징이다. 이것은 에고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전적으로 무의미한 개념이지만, 이에 대한 에고의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지 얕보지 말라. 실제로 이것은 그로부터 모든 죄의식이 생겨나는 믿음이다.
61 에고는 실로 분열이 존재한다고 믿는 마음 부분이다. 하느님의 일부가 스스로 그분을 공격하고 있다고 믿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따로 떼어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전에 말했듯이, 권위 문제에는 하느님의 권능을 찬탈했다는 개념이 수반된다. 에고는 이런 일을 네가 했다고 믿는다. 에고는 자신이 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약 에고와 동일시한다면, 너 자신을 유죄라고 지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너의 에고에게 반응할 때마다, 너는 반드시 죄의식을 경험하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릴 것이다. 에고는 아주 문자 그대로 하나의 두려운 생각이다.
62 하느님을 공격한다는 아이디어가 제정신인 마음이 볼 때는 아무리 터무니없더라도, 에고는 제정신이 아님을 결코 잊지 말라. 에고는 하나의 망상체계를 나타내며, 또한 그것을 대변한다. 에고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은 네가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너는 네가 그분의 한 부분을 찢어냈다고 믿는다. 그 죄의식은 너무나 극심해서 투사될 수밖에 없으므로, 밖으로부터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전형적인 양상이 뒤따른다. 프로이트는 기본 갈등 자체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그 영향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정확했다.
63 네가 네 마음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든 너에게 실재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적이 된 이유는 단지, 네가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네 마음 안에서 에고를 왕좌에 앉힌다면, 네가 에고를 받아들이거나 들어오도록 허용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에고를 너의 실재로 만든다. 이런 까닭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마음은 실로 실재를 창조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에 네가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과 닮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죄의식이 아닌 기쁨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죄의식은 네가 자연스럽지 않게 생각한다는 확실한 표시다. 도착된 사고는 항상 죄의식을 동반할 것이다. 그것은 정녕 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